철학

시공간의 관념성과 경험적 실재성

Jay22 2017. 1. 24. 1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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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공간의 (초월적) 관념성과 (경험적) 실재성.

 

1) 주관적 형식

공간과 시간은 어디까지나 인식 주관인 인간의 형식이다. 우리는 오직 이를 통해서만 대상을 인식한다, 하지만 이런 우리 인간의 인식조건을 떠나 사물 자체의 모습이 어떠한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이 사물이 그 자체의 모습만을 놓고 보면 공간과 시간에 구속되는지 어떤지는 우리가 알 길이 없다. 이런 면에서 공간, 시간은 우리의 경험을 떠나서 생각해 보면 한낱 우리의 관념, 생각, 형식에 불과한 것이다. 따라서 초월적, 혹은 반성적, 철학적으로 생각해 보면 이들은 그저 관념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 수 있고, 따라서 이들은 관념성을 지닌다고 볼 수 있다. 이런 면으로 공간, 시간은 어디까지나 (인간에게만 국한돼 있다는 의미로) 제한적, 상대적, 조건적이고, 이런 형식을 사물 자체도 갖고 있는지는 회의적이다.

 

2) 경험에서의 타당성

그런데 이 공간과 시간은 우리 인간에게는 선험적이다. 즉 보편적이고 필연적이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공간과 시간이라는 형식과 틀을 갖고서 사물을 바라볼 수밖에 없다. 즉 인간인 한에서는 누구나 이 조건을 사용해야 하고 모든 대상들을 이 형식을 갖고 받아들이게 된다. 이렇게 우리 인간의 경험적인 관점에서 보면 이 형식은 객관적이고 보편적으로 타당하므로 실재성을 갖는다. 우리에게 어떤 것이 주어지면 이것은 항상 공간과 시간의 형식을 띄기 때문이다. (절대적 실재성, 경험적 관념성과 반대)

 

8.1 감성의 형식인 공간과 시간: 부연설명

우리는 일상적으로 물체라는 것이 마치 우리 주변의 텅 빈 공간과 일정하게 흐르는 텅 빈 시간을 가로질러 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른바 절대 공간절대 시간이 고정적으로, 그리고 우리 외부에 독립적으로 존재해서 그 틀 위에 사물이 움직이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는 우리의 상식적인 믿음일 뿐 아니라 뉴턴의 고전역학과 근대의 자연과학이 갖고 있던 일반적인 생각이다.

 

물론 칸트도 경험적으로는 그렇게 보이는 것을 부정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공간과 시간이 (경험적 관점으로 보았을 때) 실재성이 있는 것으로 보아도 된다고, 즉 실제로 우리 주위에 텅 빈 공간과 텅 빈 시간이 따로 존재하는 것처럼 생각해도 된다고 했다. 칸트는 단지 그것이 우리 인간의 개입 없이도, 즉 우리 인간이 없을 때에도 정말 그러한지에 대한 보장이 없다는 점을 지적하는 것이다. 우리 인간이 신체적 조건을 가지고서 사물로부터 감각자료를 얻을 때만 그러한지, 아니면 그런 물리적인 접촉 없이 사물들 스스로 그 자체로도 공간적·시간적인지는 모른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것에 대해서는 모르는 상태 그대로 판단을 유보해야지, 마치 사물들 그 자체도 우리 인간이 그것들을 경험하는 것처럼 3차원적인 모양을 공간에서 갖고 있다고 여기거나, 과거에서 현재를 거쳐 미래로 나아가는 시간성을 지녔다고 생각하면, 우리가 알지도 못하는 것에게 우리의 추측을 뒤집어씌우는 것에 불과하다고 말하려는 것이다.

 

그래서 칸트는, 경험적으로는 공간·시간이 실재적이라고 여겨도 되고, 철학적으로는 그것들이 그저 우리 인간에게 속한 것, 우리의 형식, 우리가 갖고 있는 관념에 불과하다고 생각해도 된다고 보았으며 이런 이중적인 입장이 전혀 모순적이지 않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우리는 공간과 시간이라는 것이 어떻게 우리의 관념에 불과하기도 하고, 또 다른 한편으로 어떻게 우리 외부에 실제로 존재하는 것으로 생각될 수 있는가하고 반문할 수 있겠지만, 칸트는 이 두 생각들은 서로 보는 관점이 다르기 때문에 양립 가능하고, 둘 다 모순 없이 생각될 수 있다고 보았다.

 

이렇게 공간과 시간을 우리에게 속하는 것으로 규정하게 되면 경험이나 인식이라는 것의 의미가 보다 확실해 진다. 우리는 우리 외부의 모든 것을 공간적이고 시간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지 다르게는 받아들이지 못하니까 그것들은 이제 일종의 틀, 형식, 비유적으로 말하자면 그물과도 같은데, 이제 이 그물에 걸리지 않는 것들, 다시 말해 공간적·시간적이지 않은 모든 것들은 진정한 의미의 인식의 대상이 아닌 것이다. 우리에게 비록 공간적·시간적으로 나타나지는 않았지만, ‘그 너머에있는 것으로 추측되는 것은 실상 우리에게 아무 의미도 없는, 즉 우리에게 아무 것도 아닌 것이다.

 

일상적으로 우리가 무엇을 안다, 인식하다는 말을 대부분 무분별하게 사용하고는 있지만, 그것의 본래 의미는 실재하는 것, 정말로 있는 것에 대해서 우리가 안다는 것이다. 반면 있지도 않은 것, 있는지도 모르는 것을 내가 인식한다고 말하는 것은 아무 의미도 없을 것이다. 칸트적 관점으로 이제 의미 있고 실재적인 것은 공간적·시간적 속성을 가진 것뿐이니까 그렇지 않은 것, 그러니까 공간적·시간적으로 지각하지 못하는 것들, 예를 들어 영혼, 신 등에 대한 생각들은 그저 단순한 생각에 그칠 뿐이지 어떤 실재하는 것에 대한 지식이나 진정한 의미의 인식이 될 수 없다. 그래서 칸트가 공간과 시간을 우리 인식의 선험적 조건으로 본 것은 인식에 대한 기존의 의미를 대폭 제한하고 그 영역을 축소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9. 감성과 지성:

초월적 감성론과(transzenetale Ästhetik) 초월적 논리학(transzenetale Logik)

감성에서 선험적 형식으로서 공간과 시간을 찾았다면 이제 지성에서 선험적인 형식들이 무엇이지를 찾는 일이 남았다.

 

칸트는 감성 뿐 아니라 지성도 인간 인식의 형성에 필수적이라고 생각했다.

우리가 (...) 표상들을 받아들이는 우리 마음의 수용성을 감성이라고 부르고자 한다면, 이에 반해 표상들을 스스로 산출하는 능력, 바꿔 말해 인식의 자발성은 지성이다. (...) 감성적 직관의 대상을 사고하는 능력은 지성이다. 이 성질들 중 어느 것도 다른 것에 우선할 수 없다. 감성이 없다면 우리에겐 아무런 대상도 주어지지 않을 터이고, 지성이 없다면 아무런 대상도 사고되지 않을 터이다. 내용 없는 사상들은 공허하고, 개념들 없는 직관들은 맹목적이다.

(순수이성비판 A51 B75)

 

칸트는 감성과 지성은 그 기능을 서로 바꿀 수 없고, 오직 이 두 능력이 통일됨으로써 인식이 생길 수 있다고 보았다. 이 둘이 모두 있어야 의미 있는 인식이 성립하니까 이 둘은 인식에 있어서 서로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인 셈이다.

칸트는 이 둘의 관계를 이렇게 설정함으로써 경험주의적 전통과 합리주의적 전통을 종합했다고 평가받고 있다.

 

경험주의는 인식의 기원이 우리 외부에 있다는 점만 강조했지, 그것이 어떻게 우리가 인식으로 불리는 것으로 형성되었는지 설명하지 않았고, 이성론적 전통에서는 우리 이성이 어떻게 작용해서 명증적인 상태에 도달했는지 만을 연구했을 뿐 우리 외부의 대상들과의 관계에 대해서는 설명이 부족했다. 이제 칸트는 감성과 지성이 모두 필요하고 오직 이 둘이 연합해야만 인식이 형성된다고 보았으므로, 이 둘이 어떻게 인식이라는 결과물을 산출하는지를 밝히는 일은 자연스럽게 그의 다음 과제가 되었다.

 

이 지성에 대해서 다루는 이론을 칸트는 논리학이라고 부른다. 반면 감성 일반에 관한 이론은 감성론(Ästhetik)’이라고 부르는데, 이 때 어원이 되는 ‘aistheia’라는 말은 ‘Logos’에 반대되는 의미로서 감각에 의한 지식을 의미한다.

 

그런데 칸트는 전통적으로 연구돼 왔던 논리학은 일반 논리학이라고 부르고 자신의 것은 초월적 논리학이라고 구분한다. 일반 논리학에서는 순수한 사고의 작용들과 그것들이 지니고 있는 규칙들만을 그 자체로, 즉 그것이 사용될 조건이나 그것과 연관된 대상들에 대한 고려 없이 다루는 데에 그치는 반면, 초월적 논리학에서는 이 규칙들이 어떻게 대상들과 관계 맺는가를 다루게 된다.

 

우리가 참된 인식, 즉 진리를 떠올리면 우선 생각나는 것은, 우리가 인식한 것과 실재하는 대상이 과연 부합하는지, 서로 대응하며 잘 맞아 떨어지는지의 여부인데, 형식적인 논리학은 여기서 충분한 답을 주지 못한다고 칸트는 생각했다. 왜냐하면, 우리가 익히 아는 동일률, 모순율 등의 형식적 사고의 규칙들은 올바른 사고가 갖추어야 할 필수적인 규칙들만을 설명하는 것이지 그 이상의 의미는 없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일반 논리학은 모든 진리의 소극적인 조건이다. 그래서 이제 칸트는 자신의 초월적 논리학이 지성의 규칙들과 대상들의 관계를 해명해줌으로써 진리와 참된 인식을 적극적으로 밝혀준다고 주장한다.

 

10. 지성의 활동: 판단

초월적 논리학에서 칸트는 먼저, 감성이 받아들인 직관은 아직 무질서한 상태라는 점에 주목한다. 직관들은 그 자체로 아무 연관성이 없이 그저 (시간적 형식에 의해) 잇따라, 그리고 (공간적 형식에 의해) 서로 서로 곁에 있는 그런 형태로만 주어진다고 생각했다. 이 외에는 아무 연관이 없이 그저 잡다하게 주어진 이 자료들을 이제 지성이 연결해서 통일하고 질서를 부여해 준다고 그는 생각했다. 이것이 바로 지성의 역할인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일정한 규칙들이 필요한데 이것은 감성에서 찾을 수 없고 지성에게서만 발견될 수 있으며, 이것도 역시 선험적으로, 그러니까 경험적으로부터 얻어서 습득한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이미 예비되어 놓여있는 그런 성질의 것이라고 한다.

 

이제 이 규칙들이 무엇인지 찾기 위해서 칸트는 우선 지성 일반을 탐구한다. 그 때 그는 우리는 지성의 모든 활동을 판단으로 환원할 수 있고, 지성 일반은 판단하는 능력이라고 표상될 수 있다고 말한다. 여기서 판단이란 서로 다른 표상들을 하나의 공통적인 표상 아래에서 정돈하는 통일 활동을 말한다. 그래서 지성적 파악, 개념적 파악이란 다름 아닌 판단이고, 따라서 사고하는 능력인 지성은 곧 판단하는 능력이다.

 

그래서 칸트는 판단이라는 행위에서 드러나는 지성의 모든 논리적인 기능들과 통일의 기능들을 완벽하게 밝혀낼 수만 있다면 그에 상응해서 사고능력으로서의 지성의 기능들도 모두 발견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를 목표로 삼아 그가 정리한 지성의 모든 종류의 판단들은 다음과 같다


11. 지성의 형식: 범주

지성은 이렇게 감성을 통해 자료로서 주어진 잡다한(=질서 없는) 직관들을 결합한다. 이러한 활동을 칸트는 종합(Synthesis)’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우리가 앞서 살핀 방식과 같이 지성이 자료들을 종합하는 것을 보면 그것의 기준이 되는 것, 혹은 규칙이 되는 것이 그 판단에 앞서 있는 것이 아닐까하고 칸트는 생각했다. 그래서 그 기준이 되는 개념들도 판단들처럼 정확히 12가지가 있음에 틀림없다고 생각했는데, 이들이 곧 지성의 사고 형식, 범주(Kategorien)’인 것이다.

 

이렇게 발견된 결과물은 지성이 선험적으로 자기 안에 함유하고 있는, 종합의 근원으로 순수한 모든 개념들의 목록이고, 우리는 이 개념들, 즉 범주에 의해서만 무질서한 직관들의 혼란에서 무엇인가를 이해할 수 있으며, 그로 인해 대상을 개념적으로 파악하고 인식한다. 이 개념들이 없었다면 우리는 애초부터 아무 것도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칸트는 얘기한다. 그 개념들도 역시 양, , 관계, 양태의 네 가지 측면에서 각각 3 가지로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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