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칸트의 비판철학>
칸트와 당시의 학문적 배경
우리는 오늘날 정보의 시대에 살고 있다. 학문의 세계도 그 덕을 많이 보기 때문에 이제 세계 어느 곳에서 어떤 유명한 학자가 어떤 중요한 학적 결실을 발표하면 멀리 있는 다른 사람들도 이를 빠르게 접할 수 있다. 대신 오늘날의 학문은 전문화와 세분화가 심해서 한 특정 분야에서 일어난 일들은 바로 그 분야의 전공자들 외에는 큰 관심을 받지 못하기 마련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중요한 학문적 성과들도 화젯거리조차 되지 못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약 300년 전의 유럽은 이런 면에서는 오히려 더 활발한 학적교류가 있었던 것처럼 보인다. 물론 그 당시에는 오늘날처럼 기술문명이 발달하지 못했으니까 정보교환이 그렇게 빠르지는 않았지만 대신 학문적 관심은 더 집약적이어서 어느 학자의 새로운 이론에 많은 학자들의 관심이 몰리는 일이 빈번했다. 당시 철학자들의 관심과 추구하는 바는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인식론에 우선적으로 집중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생각과 토론은 어느 정도 공통된 기반 위에서 이루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학자들은 서신을 통한 학적 교류를 즐겼고, 자신의 저작들에 대한 다른 학자들의 비평 등에 민감하게 반응했었다. 오늘날의 기술 수준에 비교해서 초라한 당시의 사정을 감안하면 근대의 학문적인 의사소통은 놀랄 만큼 활발했던 것이다. 당시의 이론들은 구조적으로나 역사적으로 서로 연관성이 뚜렷했기에 근대 초기부터 약 150여년 정도의 기간 동안 그들은 인식론과 그에 기초한 이론들을 연속성을 가지고 발전시켜 나갈 수 있었다.
독일의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가 쾨니히스베르크 대학에서 학업을 시작했을 때 유럽의 철학은 근대와 함께 시작된 여러 가지 새로운 주제들, 즉 인식, 인간, 철학의 정체성 등에 대한 논의가 무르익을 대로 익었다. 이런 상황에서 칸트는 그때까지의 서양철학의 진행을 완결시킬 수 있을 만한 혁신적인 계기를 찾으려 했고, 그 모든 발전을 하나의 거대한 체계로 통합하려는 시도를 하게 된다. 그는 그때까지 전개된 이론들의 결정적인 요소들을 모두 통합하여 새로운 체계 안에 넣었고, 그 안에서 우리는 이전 이론들에서 논의됐던 요소들을 모두 다시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2. 철학의 위기: 경험론과 이성론의 한계
이미 학기 초에 언급했듯이 칸트는 새로운 근대적 이성 개념에 근거하여 철학의 새로운 가능성을 찾으려 했다. 칸트가 이렇게 새로운 철학을 꿈꿨던 이유는 이전의 철학이 위기에 처해 있었다는 나름의 진단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근대에 들어서 생겨났던 많은 사조들이 결국에는 만족할 만한 결과를 가져다주지 못하고 우리를 오히려 혼란에 빠뜨렸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는 먼저 우리가 경험론의 견해를 쫓으면 전적인 회의주의에 빠질 수밖에 없어서 확실한 인식의 가능성을 포기해야 한다고 했다. 흄과 같이 인과성 관념을 비롯한 지식의 기초신념들은 모두 한갓 습관이나 상상력 등에 기인한 근거 없는 믿음이라는 결론을 내리면 우리 지식 전체도 마찬가지로 불확실하고 근거 없는 것이 되고 만다.
반면 이성론의 생각에 동의하면, 우리가 어떤 것을 명증적으로 인식할 때 그것은 곧바로 실재적이고 존재하는 것이 된다.(플라톤의 이데아와 같이) 자아 뿐 아니라 신과 같은 존재도 우리 이성이 필연적이라고 밝히기만 하면 그것의 실재성이 동시에 주장되는 것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 그것의 경험적 근거를 찾지도 않고 그 개념으로부터 출발해서 하나의 체계를 세우려 한다. (데카르트, 스피노자, 라이프니츠 모두 신과 이성적 원리에 의한 세계의 전체적인 모습을 자신들의 이론들에서 표현했다) 이런 태도를 칸트는 독단적이고 교조주의적인 태도라고 부른다. 중세 교회에서 교리라고 공표한 것들은 의심을 허용하지 않고 무조건적으로 따르고 믿어야 하는 것들이었다. 이성론자들은 자신들의 생각, 혹은 주장이 경험이나 실재와 부합하는지 입증하려 하지도 않았고 그저 이성적, 논리적 원칙에 의해서만 진행, 발전시켰기에 그런 의미에서 이를 독단적이고 교조주의적이라고 칭했다.
그래서 칸트는 이 두 방면으로부터의 위기를 모두 극복하고 새로운 정당한 철학을 세우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이제 우리는 그가 이것을 어떤 전략으로 추구했고 또 그것이 얼마나 설득력 있는지 살펴보기로 할 것이다. 본격적인 철학체계를 세우기 전에 반드시 필요한 작업이라고 그가 생각한 것은 바로 순수 사변 이성에 대한 비판이었다.
3. 칸트와 순수이성비판
1) 재판관으로서의 이성
- 먼저 그는 이런 상황에 직면한 인간 이성은 일종의 재판관과도 같은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 왜냐하면 지식의 위기와 혼란으로 인해 지금까지의 학문들이 쓸모없다고 판단된 이상, 더 이상 그릇된 지식에 빠지지 않도록 모든 주장들을 그것들의 정당성에 따라 수용하거나 거절할 수 있는 법정과도 같은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 순수이성비판
2) 순수이성비판의 의미
- 순수이성비판은 특정한 대상에 대한 비판이 아니라 자기 자신, 즉 이성 (능력) 일반을 비판함을 의미한다. = 자기 인식.
- 비판, 혹은 판단하는 주체도 이성이고 법정에 서는 그 판단 대상, 비판 대상도 역시 이성이다. (Kritik der reinen Vernunft)
- 그래서 정당한 주장을 펴는 이성은 보호하고, 반면 근거 없는 모든 부당한 주장들은 거절하려 한다.
3) 순수이성비판의 과제
- 이성 능력 일반을 비판적으로 파악하면 이제 그것에 의한 학문인 형이상학에 관해서도 더 확실한 판단을 할 수 있으리라는 것이 칸트의 생각이었다. 그래서 순수이성비판이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것은 형이상학이라는 것이 도대체 가능한 것인지, 그리고 만약 가능하다면 어떤 원천으로부터 생겨날 수 있는지, 어디까지 가능할지(범위), 그리고 그 한계는 어디까지인지를 규정하는 것이다.
4) 새로운 형이상학
- 칸트가 우선 밝히고자 했던 것은 우리가 대상들을 인식하고 자연을 파악하는 데에 사용하는 원리들 혹은 규칙들은 무엇인가이다. (그 결과 우리는 이 원리들을 경험으로부터 얻지 않고 선험적으로 갖고 있음을 밝히게 된다.) 또한 이 원리들을 어떤 조건에서, 그리고 어느 범위 내에서 사용해야 할 것인지 역시 밝히고자 했는데 이것이 칸트 형이상학의 새로운 점이다.
- 왜냐하면 이전 형이상학에서는 이성적 개념과 원칙들을 그것들이 사용될 수 있는 조건들을 따지지 않고 그저 무조건적으로, 즉 모든 종류의 대상들에 다 적용해서 지식을 얻었다. 그런데 이제 새로운 형이상학에서는 이성의 규칙들이 사용될 대상들이 경험적인 성격의 대상들인지, 아니면 감각으로 경험할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서 있는 대상들인지를 따짐으로써 이성적 인식의 한계를 명확히 규정해 주고자 한다. (이렇게 확정된 것만이 진정한 학문으로서의 형이상학이라고 칸트는 보았다. 그렇지 않으면 그저 뜬구름 잡는 소리와도 같은 것. 근거도 없고 그저 사변적인 사고, 그러니까 공상이나 상상력에만 의지하는 사고의 유희, 놀이에 불과하다고 보았다)
- 이렇게 ‘비판’에 의해서 이성이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이 명확히 밝혀지면, 그때까지의 형이상학의 주장들 대부분이 월권적인, 즉 부당한 주장이었다고 밝혀낼 수 있기 때문에, 결국 형이상학의 전반적인 혁명이 가능할 것으로 그는 또한 보았다.
5) 형이상학의 제한과 확장
(- 이성의 자기 자신의 능력에 대한 선행적 비판이 없다면 이성은 순전히 교조주의적인 방식으로 이성을 사용할 것이다.)
- 이 비판을 통해서 이성이 사용될 수 있는 영역이 제한되면 이제 그 영역을 넘어서는 세계에서 다른 방식으로 비경험적인 대상들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다; 자연기계성에 대한 자유, 세계의 시초로서의 신, 영혼의 단순한 본성.
- 이런 대상들을 생각할 때 이들을 경험적 대상들과는 다른 종류의 대상들로 다루며 자연세계로부터 구분할 때 (비로소, 오히려) 새로운 영역의 확장이 이루어진다.
4. 인간 이성의 구조
칸트는 우리의 이성이 갖고 있는 능력, 혹은 본성을 크게 두 가지로 보았는데 감성과 지성이 그것이다.
1) 감성 (Sinnlichkeit, sensibility)
그 중 외부로부터의 모든 감각적 자극을 받아들이는 능력을 감성이라고 한다. 칸트는 감성에게 시간적·공간적으로 정리하는 기능까지 부여한다. 즉, 감성은 지각된 것을 그저 받아들이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에게 ‘지금’, ‘이전’, ‘나중’이나 ‘여기’ 혹은 ‘저기’와 같은 시·공간적 질서를 부여해 준다. 감성이 이렇게 정리한 것(직관)은 생각하는 힘인 지성에게 소재로서 제공된다.
2) 지성 (Verstnad, intellect)
- 감각으로 얻은 것을 재료로 하여 사고 작용을 하는 능력.
- 개념을 통하여 이 재료들을 종합(연결)하여 지식으로 정돈하는 의식의 작용.
5. 인식의 구조: 질료와 형식
칸트는 우리의 인식을 질료, 즉 재료와 형식으로 구분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 중 질료는 우리 외부로부터 우리의 감각기관을 통해 주어지고, 형식은 앞서 말한 바와 같이 그 이전에 미리, 즉 선험적으로 우리에게 구비돼 있는 것이다. 이 형식은 우리 이성의 두 부분인 감성과 지성에 각각 있는데, 칸트 철학의 핵심적인 부분은 이 인식의 형식이 무엇인가를 밝히는 데에 있다.
“현상에서 감각에 대응하는 것을 나는 그것의 질료라고 부르며, 그러한 현상의 잡다한 것이 일정한 관계 속에서 질서지어질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을 나는 형식이라고 부른다.” (순수이성비판 A20 B35)
6. 칸트철학의 주요개념인 ‘선험적 (a priori <--> a posteriori)’에 대하여
경험에 의존하지 않고 경험에 앞서는 인식을 선험적 인식이라고 말하고, 경험에 기초하여 생겨나는 인식을 후험적 인식이라고 부른다. 여기서 말하는 선후란 발생적인 의미에서가 아닌 논리적인 선후이다. 따라서 선험적이라고 하는 것은 경험적 인식보다 원리적으로 앞서서 이것의 전제가 되는 조건을 의미할 때 사용된다.
“우리의 모든 인식이 경험과 함께 시작된다는 것은 전혀 의심할 여지가 없다. … 그러므로 시간상으로는 우리에게 어떠한 인식도 경험에 선행하는 것은 없고 오직 경험과 함께 모든 인식은 시작된다. 그러나 우리의 모든 인식이 경험과 함께 시작된다 할지라도, 그렇다고 해서 우리의 인식 모두가 바로 경험으로부터 생겨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경험인식조차도 우리가 감각인상들을 통해 수용한 것과 우리 자신의 인식능력이 자기 자신으로부터 산출해 낸 것의 합성이겠으니 말이다.” (순수이성비판 재판 서론. KrV B 1)
칸트는 우리 인간이 우리 바깥에 있는 무엇을 경험하기도 전에 이미 어떤 것을 자신 안에 갖고 있고, 이것이 인식을 하는 데에 있어서 일종의 조건, 혹은 형식이 된다고 생각했다. 인식의 질료는 감성에 의해서 수용되므로 후험적, 경험적이지만, 인식의 형식은 어떠한 경험에도 의거하지 않은 채 이미 인식 주관에 구비되어 있기 때문에 선험적인 것이다. 이렇게 선험적인 조건들이 있다고 주장하고 이것이 인식을 형성하는 데에 영향을 끼친다고 하는 것은 곧 인간의 인식이 단순히 수동적인 행위, 즉 경험으로부터 얻어지는 것을 그저 받아들이기만 하는 행위가 아니라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인식 주체의 활동이라고 주장하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의식이 갖는 이러한 선험적 요소와 기능은 한낱 주관적인 성격에 머무르지 않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우리 외부에 있는 대상을 경험하고 규정해서 결국 인식을 가능하게 해 준다는 것까지도 의미할 수 있다. 인간의 지식(인식)은 이 선험적 형식(조건)이 기능했을 때에만 성립되고, 이럴 때에만 비로소 우리에게 어떤 대상으로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일상적으로는 우리의 인식과 관련해서 감각 혹은 경험적인 내용들만을 생각하지 우리가 갖고 있다고 하는 이런 형식적인 것들은 전혀 생각하지 않지만, 칸트는 이제 역으로 선험적인 조건들이 형식으로 작용할 때에만 그 결과로서 우리가 어떤 것을 하나의 대상으로서 인식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극단적인 표현일 수도 있지만, 이 형식이 없으면 인식 대상도 없는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그래서 칸트는 “경험 일반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들은 동시에 그 경험의 대상들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들”이라고도 말한다. 경험 자체도 선험적 형식들이 없었다면 불가능하고, 또 그것의 내용들인 대상들도 우리의 선험적 형식 탓에(혹은 덕분에) 우리에게 나타나는 바로 그대로의 대상들이 되는 것이다. 만약 주관의 형식들이 없었다면, 혹은 그것들이 지금 갖고 있는 것들과 전혀 달랐다면 우리의 인식도 다르게 성립되었을 테고 그 인식의 내용인 대상들도 지금과는 다르게 우리에게 나타났을 것이다. 이처럼 처음엔 의식되지도 않았던 주관적 형식들이 이제는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출발점이 되는 셈이다. 이렇게 칸트는 문제의 중심을 인간 외부에서 우리 인간과 그것의 내면적인 형식(조건)들에게로 전환했고, 이를 천동설에서 지동설로 전환된 천문학적 사건에 빗대어 ‘철학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라고 부른다.
(참고: 선험적 형식들은 본래는 그저 인간의식의(즉, 내적인) 요소들일 뿐이지만, 이제 이 주관적인 것들이 이렇게 그 주관성을 넘어서 객관으로 초월한다는(넘어간다는) 의미에서 이 형식들은 ‘초월적(transzendental)’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선험적인 형식들은 단지 우리 의식에 내재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영향력이 주관을 넘어서 우리 외부의 대상들에까지 미치기 때문이다)
7. 감성의 형식: 공간과 시간
칸트는 우선 감성에서 감각에 의해 갖게 되는 경험적인 것, 즉 질료적인 것은 후험적으로 주어지지만, 그것에게 질서를 주는 어떤 것은 다시 질료가 될 수 없기 때문에 어떤 형식적인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물론 이 형식적인 것은 질료적인 것이 주어지기 이전에 이미 내게 구비되어 있는 것이다. 따라서 칸트는 이것을 질료와 구분해서 따로 고찰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결론적으로 공간과 시간을 감성의 두 가지 선험적인 형식이라고 간주했다.
칸트는 공간과 시간에 대한 다각도의 설명을 통해, 이들이 경험적이지 않은 선험적인 형식이라는 점, 그리고 지성의 개념처럼 추상이나 추론을 통한 것이 아니기에 어디까지나 감성에 속한다는 점을 보여주려 했다.
1) 공간과 시간은 경험들로부터 추출된 경험적 개념이 아니다.
- 내 밖의 어떤 것이 있다는 감각을 얻으려면 이미 공간이라는 표상이 그 기초에 놓여 있어야 한다. 오히려 이 외적 경험이라는 것 자체가 공간이라는 표상을 통해서 비로소 가능하다.
- 우선 시간을 전제해야만 동시에, 혹은 잇따라 등을 표상할 수 있다.
2) 공간과 시간은 모든 (외적) 직관의 기초에 놓여 있는 선험적이고 필연적인 표상이다.
- 공간에서 아무 대상을 마주치지 않는다는 것은 상상할 수 있어도 공간이 없다는 것은 표상할 수 없다.
- 시간들로부터 현상들을 완전히 제거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시간 자체를 제거할 수는 없다.
3) 공간과 시간은 사물들 일반의 관계에 대한 보편적인 개념이 아니라 순수한 직관이다.
- 우리는 단 하나의 공간만을 표상할 수 있을 뿐이다. 많은 공간들은 하나의 공간의 부분들일 뿐이지 이 많은 공간들이 합쳐져서 하나의 공간을 이루는 것이 아니다. 우선 공간이라는 표상이 있어야 그 후에 공간에 관한 모든 다른 표상들이 가능하다.
- 서로 다른 시간들은 동일한 시간의 부분들일 뿐이다. 단 하나의 대상에 의해서만 주어질 수 있는 표상은 직관이다. 종합적인 성질을 가진 개념으로부터는 이 표상이 생겨날 수 없다.
4) 공간은 무한한 양으로 표상되는데 우리는 무한히 많은 표상들을 자기 아래에 포함하고 있는 어떤 개념도 생각할 수 없다. 그러므로 공간은 선험적 직관이지 개념이 아니다.
근원적 시간은 무제한으로 표상된다. 각각의 시간들은 이런 무제한적인 시간을 제한함으로써 생겨난다. 이런 전체 표상은 개념에 의해서 주어지지 않고 그 기초에 직관이 놓여 있다.
5) 결론적 주장
- 공간은 어떤 사물들 자체의 속성이나 그것들의 관계를 나타내지 않는다. 그저 우리의 외감, 즉 외적 대상들과 관계하는 감성의 형식일 뿐이다. 우리는 오직 이 공간이라는 주관적 조건에 의해서만 외적 직관을 가질 수 있다. 우리가 외부의 대상들을 받아들일 때에 항상 ‘서로 곁하여’라는 공간적 형식을 통해서 수용하게 된다.
- 시간은 우리 의식의 내감의 형식으로서 우리가 내 의식 속의 표상들을 수용할 때 항상 ‘서로 잇따라’라는 시간적 형식을 갖기 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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