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

플라톤과 좋은 삶

Jay22 2017. 1. 28. 08: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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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플라톤(BC 427-347)과 좋은 삶 >

 

1. 플라톤의 대화편에서 소크라테스는 정의, 용기 혹은 경건과 같은 주제들을 다루면서 우리가 이와 같은 것들이 무엇인지 알아야 그러한 덕목을 갖출 수 있다고 얘기한다. 그래서 이들의 의미를 정확히 밝히고자 하는데 이 과정에서 이데아라는 것을 가정하게 된다.

 

먼저 그는 각 대화편들에서 문제가 되는 주제의 다양한 예들을 열거한다. 그리고는 그 모든 예들에서 문제의 덕, 경건, 정의, 용기 등이 모두 발견되는 것을 지적한다. 하지만 그 구체적인 예들이 곧 그 덕목 자체는 아니라는 것도 언급한다. 따라서 그런 구체적인 경우들 외에 덕 그 자체가 따로 있지는 않을까하는 발상을 갖게 된다. 대화편 에우튀프론의 경우 토론되는 주제는 경건이라는 덕목인데, 경건에 대한 여러 사례들을 에우튀프론으로부터 들은 소크라테스는 다음과 같이 얘기한다.

 

자네도 기억하다시피 내가 자네에게 수많은 경건한 것들로부터 하나 혹은 두 개의 경건한 것들을 가르치려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경건한 것들이 이를 통해서 경건하게 되는 형태(eidos) 그 자체를 가르치려 하지 않았나? 왜냐하면 자네도 인정했다시피 모든 경건한 것들이 경건한 것은 그것들이 갖고 있는 어떤 하나의 모습(idea) 때문이지 않은가?" (6d9이하)

 

내가 이 형태 자체를 보면서 (모든 경건한 것들의) 원형으로 사용할 때에, 이 형태가 내게, 무엇을 자네(또는 다른 이들)의 행동들에서 경건한 것으로, 또 어떤 것은 그렇지 않은 것으로 설명할 수 있을지를 가르쳐 준다네.” (6e4이하)

 

여기서 소크라테스는 여러 다양한 경건한 행위들과는 구분되는 경건함 그 자체, 경건함의 원형이 있고, 이를 통해서 비로소 여러 행위들이 경건해 질 수 있는 것이 아니냐고 묻는다. 경건한 행위들은 다양하고 천차만별이지만 경건함 자체는 하나이고 동일한 것이다. 어떤 행위가 이 경건함의 모습, 원형을 그 안에 가지고 있어야 경건한 행위가 될 수 있으므로 우리는 경건함 자체의 모습을 이미 알고 있어야 이를 기준으로 어떤 행위가 경건한지 아닌지를 알 수 있다.

 

 

2. 그의 이 생각을 다음의 예를 들어 구체적으로 살펴보기로 하자.

 

이 포도주는 훌륭하다

그 운동선수는 훌륭하다

 

이 두 문장에서 우리는 훌륭하다라는 술어가 포도주운동선수라는 상이한 개별적 대상에 대해서 아무런 문제없이 사용되는 것을 보았다. 그런데 그 이유가 이 포도주와 운동선수가 서로 어떤 밀접한 관계에 있거나 특별한 연관이 있어서는 아닐 것이다. 포도주와 운동선수는 각기 다른, 어떻게 보면 전혀 상관없는 개개의 대상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우리는 훌륭하다라는 동일한 서술어를 자연스럽게 이 둘에게 적용하는지를 플라톤은 묻고 있다.

 

또 다른 예를 들어 보자.

 

마이클 조단은 크다

샤킴 오닐은 크다

 

각각의 문장에서 두 선수들은 모두 크다고 서술되고 있다. 2미터가 조금 안 되는 신장을 가진 농구 선수 조단을 보고 크다라고 한다면 아마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동의할 것이다. 그런데 이제 2미터를 훌쩍 넘는 또 다른 선수 오닐이 그의 옆으로 다가 온다면 누구나 조단의 상대적으로 작은신장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플라톤은 이처럼 여러 가지 속성들이 어떨 때는 그렇게 보이기도 하고 어떨 때는 그렇게 보이지 않기도 하다는 것에 주목하여 다음과 같이 묻는다.

 

"이 많은 아름다운 사물 가운데에는 추해 보이는 어떤 것도 있지 않을까? 그리고 정의로운 것들 중에는 정의롭지 않게 보이는 것 또한 있지 않을까?"

 

"그러면 많은 두 배의 것들은 어떠한가? 그것들도 어떻게 보면 두 배 못지않게 반으로도 보이겠지?"

 

"그리고 우리가 크다거나 작다거나 가볍다거나 혹은 무겁다고 부르는 것들의 경우 그것들이 (그 반대로 불리지 않고) 꼭 그렇게 불리어져야만 할 정당성이 있는 것일까?" 국가(479a이하)

 

플라톤은 우리가 이처럼 상이한 대상들과 다양한 맥락들 속에서도 자연스럽게 여러 가지 개념들과 의미들을 문제없이 언급할 수 있는 이유를 그것들의 원형에서 찾고자 했다.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모든 속성들에는 그것의 원형들이 있기에 우리는 그에 힘입어 여러 사물들을 그러하다고(훌륭하다거나 크다거나) 여기는 것이다. 이런 공통된 기반이 있기에 서로 전혀 다르고 연관성도 없는 대상들에 대해서 그 서술어가 공통으로 사용될 수 있다는 것이다. ‘맛있음’, ‘’, ‘붉음’, 심지어는 인플루엔자와 같은 개념들은 모두 어떤 특정한 내용의 의미이자 원형으로서 여러 관계없는 개별적 대상들이 때에 따라 그렇게 되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

그리고 개별적인 대상들, 가시적인 사물들은 그 자체로 어떤 성질을 갖는 것이 아니라고 볼 수 있다. 마이클 조단이 홀로 일반인들 사이를 거닌다면 우리에게 그는 크다고 보이겠지만, 그가 농구코트에서 다른 장신 선수들 사이에서 공을 리바운드 하려 한다면 우리는 그 즉시 그의 작음을 알아차릴 것이다. 따라서 크다는 속성은 조단 자신에게 필연적으로 속한 속성이 아니다. 그것은 제한적으로만 그에게 귀속되었을 뿐이고 오닐과의 비교에서는 더 이상 그에게 속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조단은 그 자체로, 항상, 혹은 본질적으로 큰 것이 아니다. 의 원형은 조단 안에 있지 않고 따로 있어서 때때로 그에게 크다는 속성을 가능하게 한다.

 

또한 조단, 포도주 등의 개별적 대상에서 크다’, 혹은 훌륭하다와 같은 속성이 나타나는 것은 사실이지만 ’, 혹은 훌륭함그 자체가 완벽하게 구현되지는 않는다. 어떤 개념과 완전히 동일한 실제 대상은 자연 세계에 없으며 따라서 이들의 원형은 감각으로 경험할 수 있는 현실에서는 찾을 수 없다. 여러 가지 개별대상들에서 이데아는 완전히 나타나지 않고 단지 부분적으로만 나타날 뿐이다. 이처럼 가시적 사물들이 본질적으로 크거나 작은 것도 아니고, 또한 ’, ‘작음자체가 가시적 사물들과 별개로 존재한다면, 가시적 사물들은 도대체 어떻게 경우에 따라 크다거나 혹은 작다고 서술되며 또한 그렇게 나타나는 것인가?

 

플라톤은 가시적 사물들이 이데아에 참여(Methexis)하기 때문에 그렇다고 대답한다. 조단이 컸던 이유는 그가 자체에 참여하고 있었기 때문인데 오닐이 이제 그보다 크다고 나타나는 이유는 그가 의 이데아에 (조단보다 더 많이) 참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상식적으로는 다소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조단은 그 자신이 본래(본질적으로) 크기 때문에 큰 것이 아니라 어느 정도로만 의 이데아에 참여하기 때문에 크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데아와 가시적 사물들의 관계는 또한 사물과 그림자의 비유로도 묘사된다. 이것은 마치 화가가 어떤 대상을 본으로 해서 그것을 똑같이 그리는 것과도 같아서, 이데아가 원형인 반면 가시적 사물들은 그것의 그림자, 혹은 본뜬 모습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림이란 실재하는 사물의 오직 한 측면만을, 혹은 제한적으로만 보여줄 수 있듯이 이데아는 그것을 모사한 사물들보다 더 온전한 존재이고 더 충만한 내용을 갖고 있다.

 

3. 4가지 관점을 통해 이데아를 구체적으로 살펴 본 내용은 교재 136-149p.를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4. 이데아의 인식에 관하여

우리가 어떻게 이 이데아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며 또 어떻게 그것에 대한 인식에 이를 수 있는가를 위한 방법으로서 플라톤이 생각한 것은 대화하는 기술로서의 변증법이다. 여기서 변증법은 논의의 주제와 대상에 대해 적절하게 대화하는 기술, 또한 논의 대상에 대해서 그것이 무엇인지 해명하고 변론하는 기술을 의미한다. (헤겔이나 마르크스 등이 거론하는 변증법은 다소 다른 의미이다. 플라톤에서도 두 가지 의미의 변증법이 있는데, 논리학의 초기 형성단계에 해당하는 변증법은 대상들을 분류하여 하나의 특정한 개념에 이르려는 시도를 뜻하고 주로 플라톤의 후기 사상에서 많이 발견되는 반면, 전기 사상에서 변증법이라 지칭되는 것은 이 논쟁술에 해당한다)

 

플라톤의 대화편에서 항상 대화를 이끌어 나가는 소크라테스는 상대방과 의견을 주고받으며 어떻게 하면 주제에 대한 참된 지식에 이를 수 있는가를 모색한다. 그 첫 번째 단계에서는 우선 대화 주제에 대한 정의를 내리기 위해 그에 대한 물음을 던지며 이에 대한 상대방의 대답들을 듣는다. 그리고는 그 대답들이 서로 모순 없이 합치하는지를 검토하는데 늘 부정적인 결론을 도출한다. 대화 상대방의 지식들은 대부분 근거 없거나 상호 모순적인 의견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이 의견들의 잘못된 점들을 일일이 지적하고 논박해서 결국 해결책이 보이지 않는 듯한 난해한 상황(아포리아)으로까지 이끈다. 변증법의 우선적인 본질은 바로 이런 논증 방식에 있다. ‘elenchos’라고도 부르는 이 논쟁을 통해서 기존의 의견과 주장들은 철저히 검증돼서 (한갓 추정이나 믿음들뿐이라는) 그 정체가 밝혀진다. 이렇게 대화 상대방은 자신의 헛된 지식이 논증에 의해서 파괴된 후 자신의 무지를 인식하게 된다. 잘못된 속견들이 이렇게 제거된 후에야 그는 참 지식에 도달하기 위한 준비가 된 것이다. 이 논증을 통해서 그의 영혼은 정화된다고 플라톤은 생각했고 이제 지금까지 그를 얽어맸던 잘못된 의견들로부터 해방된 대화 상대방은 참된 지식이 무언지를 배우려는 자세를 갖게 된다.

 

이후 자유롭게 된영혼은 계속되는 비교와 검증을 통해서 보다 일반적인 개념으로 거듭해서 올라가게 되고 종국에는 이데아의 세계에 대한 지식에 이를 것이라고 플라톤은 서술한다. 그 구체적인 방법보다 여기서 더 중요한 것은, 참된 지식을 위한 여정은 감각세계를 떠나 이데아의 세계로 향해야 한다는 것이다. 플라톤은 가시적인 세계에서는 참된 지식과 실재적인 대상들을 찾을 수 없다고 보았는데 이를 설명하기 위해서 그가 끌어들인 것은 거의 신화적인 색채를 띤 이야기였다.

 

그는 우리가 죽었을 때에도 우리의 영혼은 남아서 이데아의 세계로 돌아가 있다가 가시적인 세계의 육체라는 감옥에 다시 돌아오는데 이 때 이데아에 관한 지식을 모두 잊는다고 했다. 그래서 가시적인 세계에서는 이데아에 대한 뚜렷한 인식은커녕 마치 어두컴컴한 동굴 속에서 동굴 입구에 위치한 모닥불의 불빛에 비친 그림자들만을 보는 것과 같이 혼미한 인식만을 갖는다고 하였다. 그러다가 앞서 말한 변증법적 논쟁 등에 의해서 영혼이 정화되는 계기를 갖고서 감각적인 지식으로부터 해방되면 이전의 지식을 상기하여 이데아를 다시 알아보게 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동굴과도 같이 불분명한 지식의 상태에서 벗어나 점차 태양이 내리쬐는 밝은 곳과도 같은 진리의 세계로 나와서 이데아를 바라보고 마침내 참된 지식에 도달할 것이라는 생각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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