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카르트 (René Descartes, 1596 – 1650)
『방법서설』 (Discours de la méthode, 1637)
『제1 철학에 관한 성찰』 (Meditationes de Prima philosophia, 1641)
데카르트는 우리가 절대적으로 확실한 지식을 갖는 것은 모든 형태의 회의주의를 논파해야만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그가 활동했던 근대 초기는 -이미 아는 바와 같이- 기독교의 유일한 절대 권위가 지배했던 중세시대가 막을 내리면서 르네상스라는 과도기를 거쳤던 회의주의와 혼란이 극대화된 상태였다. 하지만 이런 시대적 상황에 대한 반동으로 확고한 지식에 대한 열망이 그 어느 때 보다도 강했던 것 또한 사실이다. 로크 역시 비슷한 동기를 가졌는데 그는 경험론적 방법론으로써 이를 시도했다면, 데카르트는 이제 합리적 절차를 통해서 이를 얻으려 한다. 흄과 같은 경우도 비록 그 결말은 회의적인 방향이었지만 애초에는 이런 확실한 지식의 가능성을 확인하려 한 시도였다고 볼 수 있다.
1. 이성 사용의 규칙
데카르트는 그런데 회의주의자들과는 달리 처음부터 모든 인간은 자연적으로, 그리고 그 본성상 이성을 소유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진리에 이르는 길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다는 생각과 그런 보편적인 인식능력에 대한 믿음을 그는 처음부터 갖고 있었다. 그래서 당시 팽배했던 회의주의와 관련해서도 이런 혼란이 인간정신의 본성, 즉 이성에게 결함이 있기 때문에 야기됐다고 생각하지 않았고 단지 인간이 그 이성을 잘못 사용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진리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이성을 단지 소유하기만 해서는 안 되고 이를 올바로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이 이성을 잘 사용할 수 있을까 하는 방법론에 우선 관심을 가졌다. 이런 배경에서 그가 생각해낸 이성의 올바른 사용을 위해 지켜야 할 규칙들은 다음과 같다.
첫째, 명증성의 규칙.
명증적으로 참이라 인식한 것 외에는 무엇도 참된 것으로 받아들이지 말 것. 속단과 편견을 신중히 피하고 의심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명석 판명하게 내 정신에 나타난 것 외에는 그 어떤 것에 대해서도 판단하지 말 것.
둘째, 분해의 규칙.
검토해야 할 어려움들을 각각 잘 풀 수 있도록 가능한 한 작은 부분들로 나눌 것.
셋째, 종합의 규칙.
가장 단순하고 알기 쉬운 대상에서 출발하여 계단을 오르듯 조금씩 올라가 가장 복잡한 것을 인식하는 데에까지 이를 것. 순서가 없는 것들에 대해서도 순서를 설정하여 나아갈 것.
넷째, 열거의 규칙.
아무 것도 빠뜨리지 않았다는 확신이 들 때까지 완벽한 열거와 전반적인 검사를 어디에서나 행할 것.
데카르트는 참인 것으로 완전하게 신뢰할 수 있는 지식을 얻으려면 위와 같은 방법으로 탐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데카르트의 방법 가운데 명증성을 강조하는 첫 번째 규칙이 가장 중요했는데, 그것이 모든 지식들의 시작이고 출발점이고 전제이기 때문이다. 이제 이런 명증적인 지식을 얻기 위한 방법으로서 그가 채택한 것은 모순되게도 ‘회의’라는 것이었다. 회의가 모든 철학적 성찰의 출발이자 필수 불가결한 구성요소인 이유는 우선 상식과 이론 사이의 차이에 있을 것이다. 이미 여러 번 언급했던 현상과 실재에 관련된 내용을 상기해 보면, 철학적 성찰이 있기 전에는 누구나 상식적으로 우리에게 나타나는 것이 실제로도 그러할 것이라고 여긴다는 것을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철학적으로 그것을 반성해 보면 현상과 실재를 구분할 수밖에 없다. 또한 근대의 자연과학의 발전에 힘입어 자연사물의 ‘진정한’ 모습에 대한 관심도 증대되었다. 그래서 상식적이고 감각적인 지식을 넘어서는 진정한 지식을 획득하려고 근대 철학자들은 노력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전까지의 상식적 관점에서 쉽게 벗어나기가 쉽지 않고, 또 인간은 기본적으로 육체에 얽매여 있고 감각에 구속되어 있는 존재이므로 이성의 온전한 가능성과 능력대로 지식을 갖는 일이 결코 일순간에 이루어질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따라서 근대 철학자들은 하나 같이 인간을 이런 미성숙으로부터 해방시키고자 했고, 이렇게 “정신을 감각으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것”에 가장 적절한 방법론으로서 데카르트는 회의를 선택했다. 우리가 자연적으로 얻게 되는 모든 지식들에는 이렇게 상식과 단편적이고 감각적인 지식이 전제되어 있으므로 이 지식들을 하나하나 회의해 보는 것이 그 지식들의 부당성을 가장 잘 보여줄 수 있기 때문이다.
2. 방법론적 회의
이런 데카르트의 회의를 우리는 방법론적 회의라고 부른다. 그것은 단순히 회의 그 자체를 위한 회의라는 뜻이 아니라 진리에 도달하기 위한 방법으로서 행해지는 회의라는 뜻이다. 우리가 회의에 회의를 거듭하고 가능한 모든 회의를 다 했는데도 도저히 회의하고 의심할 수 없는 것이 남아 있다면, 그리고 이것이 모든 회의를 다 이겨낸 지식이라면 그것이 곧 우리가 찾는 진리인 것이다.
그래서 이제 데카르트는 우리의 모든 지식들을 하나하나 다 의심해 보고자 한다. 그럴 때에 가장 먼저 간단하게 의심할 수 있는 것은 우리 주위의 모든 것들일 것이다. 여기 보이는 책상, 의자, 나무 등 여러 가지 것들인데 그런 모든 개별적 대상들에 대한 개별적 지식들을 하나하나 철저하고 완벽하게 의심하는 것은 끝내기가 매우 어려울 것이라고 쉽게 생각할 수 있다. 왜냐하면 개별적인 지식들은 그 수가 무척 많고 또 다양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런 다양한 개별적 지식을 낳는 방법을 의심하면 철저하고 완벽하게 의심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갖는 수많은 지식들을 낳는 방법은 당연히 감각 경험을 통하는 것이다. 우리는 경험을 통해서 내 앞에 있는 책상, 의자 등 모든 것에 대한 지식을 얻는다. 그러나 이런 감각 경험이라는 방법은 우리가 이미 숱하게 말했듯이 확실한 방법이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지각을 할 때 흔히 착각하고 잘못 판단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감각기관은 종종 우리를 속이고 기만한다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다. 그런데 데카르트는 단 한 번이라도 우리를 속인 일이 있는 것은 결코 전폭적으로 신뢰하지 않겠다는 규칙을 세운다. 그래서 우리가 종종 갖는 감각에 의한 오류는 곧 감각 경험 일반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진다.
우리가 감각경험을 믿을 수 없는 두 번째 이유는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것이 꿈속에서 일어난다고 의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이른바 ‘꿈의 가설’인데, 우리는 감각 경험을 통해 얻은 상식적인 세계를 실재한다고, 현실이라고 여기지만 그것은 어쩌면 꿈일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이 생각이 얼핏 허무맹랑하게 보일지도 모르겠지만 이 가설을 부정할 수 있는 확실한 근거도 없다는 것 또한 사실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몇 몇 문학 작품들, 예를 들어 ‘구운몽’이나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 등에서 주인공들은 자신이 꿈속에 있는 줄도 모르고 그 꿈속에서 일어난 일들을 현실이라 착각하고 있다. 그들이 그 꿈에서 깨어나지 않았다면 그들은 아마도 영원히 그것이 진짜 세계라고 착각할 것이다. 또한 공상과학영화 ‘Matrix’의 예를 들어 보자면, 영화 속에서 사람들은 멋있는 모습으로 거리를 활보하고 다니는데 사실 이 환경은 사이버공간이며 가상의 틀인 Matrix일 뿐이고 실제로 인간들은 기계들이 마련해 놓은 일종의 인큐베이터 안에서 생체 에너지를 빼앗기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주인공들을 제외한 대다수의 사람들은 이 가상의 세계 매트릭스가 현실이라고 굳게 믿고 있다. 이렇게 꿈이나 가상 세계 등에서 현실과 똑같은 느낌이 들도록 모든 것이 그럴듯하게 짜여 있으면 그 안에 있는 당사자는 그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을 가능성이 충분하다. 이런 가설까지 총동원하면 결국 우리는 감각경험과 그를 통해 얻은 모든 지식들과 이 현실 세계가 확실하지 않은 것으로 의심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면 꿈속에서건 현실 안에서건 항상 성립하는 것도 있다. 가령, 2+3=5라는 것은 꿈이 아닌 세계에서도, 꿈에서도 참이다. 우리가 꿈꾸고 있는 동안에도 여전히 2+3=5이고, 삼각형은 세 개의 변을 가지며, 둥근 사각형은 불가능하다. 꿈에서도 이런 지식이 성립한다는 사실은 우리가 이러한 수학적 지식들을 획득하는 데 있어, 감각 경험이 불필요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런 지식들은 감각 경험이 아니라 순수하게 정신적인 방법을 통해서 획득될 수 있는 것이다. 물체의 연장, 형태, 크기, 수와 같은 것들은 꿈속에서도 현실과 똑같이 역시 그러하고 (기껏해야 그 배열과 배치를 우리의 무의식이 임의대로 뒤바꿀 수 있을 뿐이다) 따라서 꿈의 가설을 이용해도 흔들리지 않는 확실한 지식인 셈이다.
그러므로 이런 종류의 지식들을 명증적인 지식으로 삼고 회의를 멈추어도 될 것 같은데 여기서 데카르트는 한 걸음 더 나아가 다소 엉뚱한 상상을 덧붙인다. 그것은 혹시 우리를 창조한 전지전능한 창조주가 악한 심성을 갖고 있는 존재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가정이다. 아니면 어떤 악마와도 같은 존재가 있어서 우리를 순수한 악의로 계속해서 기만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이것이 바로 ‘악마의 가설’인데, 어떤 전능한 악마가 있어서 수학적 지식을 획득하는 방법, 즉 순수하게 정신적인 방법도 그 악마가 만들었다고 생각해보는 것이다. 그리고 이 악마는 물론 이를 통해 악의적으로 잘못된 지식을 산출한다. 하지만 이 악마는 우리 인간이 이 정신적인 방법을 사용해서 무언가를 알 때마다 이 지식이 자명하고 참된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도록 우리 정신을 조작하는 것이다. 그래서 2+3은 본래 6인데 악마는 우리로 하여금 5라고 잘못 계산하게끔 만들었고 더 나아가 우리는 그것이 확실하게 참이라고 잘못 의식하게끔 만들기도 했다. 만약 사정이 정말로 이렇다면 우리가 이 전 단계의 회의에도 굳건히 살아남은 수학적 지식, 이성을 통한 지식도 참되고 확실한 것이라고 자신할 수 없다. 데카르트는 이제 우리가 과연 이런 악한 존재가 없다고 확신할 수 있는 근거를 갖고 있는지 물음으로써 그의 방법론적 회의의 절정에 다다른다. 이런 극단적인 회의는 물론 현실성이 부족해 보이지만 과연 우리의 지식이 얼마나 확실하지를 따지는 데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래서 이제 수학적 진리를 포함해서 가능한 모든 것이 의심스럽게 되는데 이렇게 의심에 의심을 계속하던 데카르트는 의심의 끄트머리에서 다음과 같은 생각을 한다.
내가 지금 꿈을 꾸고 있다고 하더라도, 이 꿈을 꾸고 있는 나는 존재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그리고 내가 지금 전능한 악마에서 철저히 속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 속임을 당하는 나는 반드시 존재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런 의심을 하고 있는 바로 이 순간에도, 의심을 하는 내가 존재해야 의심도 가능하고 회의도 가능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의심하는 나, 회의하는 나, 이 모든 것을 생각하는 나는 반드시 존재해야 한다는 결론에 다다른다. 그의 말을 인용하자면,
“그러나 이런 식으로 모든 것이 거짓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동안에도 이렇게 생각하는 나는 반드시 어떤 것이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ego cogito, ergo sum)’라는 진리는 아주 확고하고 확실한 것이고, 회의론자들이 제기하는 가당치 않은 억측으로도 흔들리지 않는 것임을 주목하고서, 이것을 내가 찾고 있는 제일원리로 거리낌 없이 받아들일 수 있다고 판단했다.” - 『방법서설』 1권 7장
이런 체계적 회의 끝에 데카르트는 회의할 수 없는, ‘나 자신은 존재한다.’는 진리에 도달한다.
“악령이 온 힘을 다해 나를 속인다고 치자. 그러나 내가 나 자신이 어떤 것이라고 생각하는 동안, 그는 결코 내가 아무것도 아니게 끔은 할 수 없을 것이다. 이렇게 이 모든 것을 세심하게 고찰해본 결과 ‘나는 있다. 나는 존재한다.’라는 명제는 내가 이것을 발언할 때마다 혹은 마음속에 품을 때마다 필연적으로 참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 『제1 철학에 관한 성찰』 중 제 2성찰.
이 회의 불가능한 진리,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ego cogito, ergo sum).’라는 명제는 철학적 탐구가 획득한 첫 번째 결론이자 데카르트 철학에서 제 1원리의 위치를 차지한다. 그는 이 원리로부터 진리의 기준을 이끌어 내는데, 그는 이제 모든 철학적 탐구의 결과는 이 명제처럼 회의 불가능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3. 신 존재
그런데 이 명증적인 지식은 그저 첫 걸음일 뿐이지 다른 문제들이 어떻게 해결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실마리는 아직 보이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가 지금까지 얻은 것은 오직 자아의 존재일 뿐 외부 세계의 존재나 다른 지식들의 확실성 등은 아직 밝혀지지 않은 채로 남아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우리는 먼저 그가 확보했던 이 명증성이 언제까지나 유지되는지 물을 수 있다. 즉, 어제 명증적이었으면 오늘 또 명증적인지를 물을 수 있다. 이렇게 얼핏 사소해 보이는 이런 질문이 제기되는 이유는, 데카르트가 오랜 회의 끝에 겨우 얻어낸 그 명증성은 전적으로 우리의 의식에 의존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의심하는 가운데 부정할 수 없는 자아를 떠올리는 나의 의식 그 자체가 명증적인 것이기 때문에 만약 내 의식이 이 자아의 존재를 더 이상 의식하지 않거나 다른 사태에 관심을 가져서 다른 대상을 의식하려 하면 최초의 명증성이 소멸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때는 자아에 관한 의식이 다시 애매해지고 혼잡스러워질 수 있다. 그래서 마치 버클리에게서 발견한 것과 같이 나의 의식이 집중하고 있는 순간을 떠나서도 이 명증성이 타당한 것이지를 묻게 된다. 즉, 한 번 명증적인 것은 이후에도 명증적인 것으로 밝혀져야 여기서부터 출발하는 다음 탐구의 정당성도 확보되는 것이다.
이 문제와 다른 모든 문제들의 해결을 위해서 데카르트가 끌어들인 것은 바로 신의 존재이다. 정신과 자아의 존재라는 주관적인 영역에서만 입증된 명증성만으로는 그것의 항구적 타당성 뿐 아니라 외부 세계의 존재 또한 보장될 수 없다. 데카르트는 이제 신이 존재해야만 비로소 이 모든 의문들이 해결된다고 생각했다. 그는 신의 존재를 한 번은 이성론적으로, 그리고 또 한 번은 존재론적으로 증명했는데, 그 중 이성론적 증명이 밟는 단계는 다음과 같다.
1. 명증적인 인식은 참이다.
2. 내 의식에 명증적인 인식으로서 신의 관념이 있다.
3. 원인 없이는 결과도 없으므로 신 관념의 내용을 있게끔 하는 원인이 있어야 한다.
4. 이 원인의 내용은 그 결과인 신의 관념의 내용보다 크거나 적어도 같아야 한다.
5. 그런데 신의 관념은 무한하고 완전하며 전지전능하다는 것이다.
6. 그러므로 이 완전한 신의 관념의 원인은 나 자신이거나 내 의식 내에 있는 또 다른 관념일 수가 없다. 왜냐하면 나나 내 안의 다른 관념들은 무한하지도 완전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7. 그러므로 내 의식 내에 있는 신의 관념을 일으킨 원인은 내 의식 밖에 있는 어떤 것이어야 한다.
8. 따라서 신 관념을 내 의식에 일으킨 원인으로서의 신은 내 밖에 실재한다.
두 번째 존재론적 증명은 이미 중세의 안셀무스가 다음과 같이 시도한 바가 있다.
신은 개념상 최고로 완전한 것이다.
완전성에는 존재도 포함된다.
따라서 신은 존재한다.
그의 이러한 신 존재 증명은 후대에 와서 타당하지 않은 것으로 비판 받아 왔지만 여기서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신 존재가 그의 주관적인 명증성의 한계를 어떻게 극복하는지를 밝히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신의 존재가 그의 철학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지를 다양한 관점에서 살펴보기로 하자.
먼저 인식론적인 측면에서 볼 때 신은 이성을 창조한 존재자라는 점이 강조된다. 완전한 존재자인 신은 선한 심성을 가질 수밖에 없고(악한 심성이 완전성의 개념에 포함되는 것을 상상하기는 어렵기 때문에) 그런 존재인 신이 이 이성을 인간에게 구비시킨 의도 역시 선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이 이성은 본성적으로 결함이 없는 것이고, 그것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것들 역시 신뢰할 만하다고 생각해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종종 빠지는 오류들은 이성 자신의 구조적인 결함 때문이라기보다는 이것을 우리가 (과한 욕구나 강한 의지 등으로) 잘못 사용했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이성이 명증적이라고 판단한 것들을 의심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 악마의 가설에 의해서 의심되었던 수학적 지식 등의 타당성도 이렇게 다시 회복된다. 또한 신이 우리에게 선사한 이 이성의 능력에 비추어 볼 때 한 번 명증적인 것으로 확인된 인식을 다시금 의심할 이유도 없다. 왜냐하면 “한 번 행해진 것은 결코 행하지 않은 것일 수가” 없기 때문이다. 한 번이라도 (옳은 방식으로) 명증적임이 밝혀졌다면 그것은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고 우리는 조물주인 신의 선한 본성에 의거해서 생각할 수 있다.
또한 존재론적으로 볼 때 신은 바로 우리가 대하는 세계를 창조한 존재자이고 역시 이를 선한 의도와 함께 창조했기 때문에 우리가 이 세계에서 발견하는 합리적 원리의 타당성도 의심할 이유가 없고, 또한 우리가 명석 판명하게 지각하기만 한다면 그 지각의 내용을 의심할 이유도 없다. 왜냐하면 “신은 우리를 기만하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감각적 지식에서는 오류가 발생할 가능성이 더 크므로 전적으로 신뢰할 수 없겠지만, 그런 상식적인 지식조차도 이제 데카르트의 이론에서는 실천적인 관점에서 볼 때는 유용한 것으로 여겨진다. 우리가 자연으로부터 얻는 “가르침”은 신이 우리에게 자연을 통해 주는 교훈으로서 이것이 우리에게 전해주거나 경고해 주는 것을 잘 따르면 우리의 실제 삶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보았다.
마지막으로 신은 이 세계 전체와 우주의 운동을 발생시킨 궁극적 원인이다. 신은 이 모든 것을 창조했을 뿐 아니라 그것이 진행하는 법칙까지 만들었는데, 한 번 창조된 우주는 이제 이 법칙에 따라서 운동하게 된다.
이렇게 데카르트는 최초에는 극단적인 회의를 가지고서 철학적 사고를 시작했는데 자아의 존재에 대한 확신을 얻은 후 신의 존재 증명을 거쳐 결국 우리 이성의 능력에 대한 신뢰, 외부 세계의 존재, 그 안에 깃들어 있는 합리성, 심지어 일반적인 감각적 지식과 상식조차도 각각의 영역에서 그 정당성을 보장받는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다.
데카르트의 실체개념: 정신과 물체
데카르트는 실체를 “존재하기 위해 다른 어떤 것도 필요로 하지 않고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라고 정의했다. 그래서 실체는 자존적이고 독립적인 존재인데 이 규정에 온전히 합당한 것은 오직 ‘신’뿐이다. 신은 ‘무한실체’로서 다른 모든 것들은 이 신에 의존하는 존재이다. 그런데 데카르트는 이 세상에도 비록 신처럼 완전한 의미는 아니지만 역시 실체로 불릴 수 있는, 이른바 ‘유한실체’가 있다고 보았다. “비록 존재하기 위해서 신의 협력을 필요로 하지만, 다른 피조물에는 의존하지 않는” 것들은 ‘정신’과 ‘물체’라는 두 개의 실체이다. 데카르트는 신이 비록 이 세계를 창조했지만 그 자신은 이 세계와 분리되어 있는 존재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 세계의 실재를 설명하기 위해서 이 ‘약화된’ 실체들의 존재도 인정한 것이다.
이 두 실체들은 각각 ‘사유’와 ‘연장’이라는 서로 배타적인 속성을 가지고 있다. 물체와 정신을 분리한 그의 이원론은 자연과학적 탐구와 정신적인 탐구 모두를 정당화했으며 이후 과학과 철학의 분리를 촉진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그의 이런 생각은 새로운 인간관과 새로운 세계관을 역시 가져왔다. 그는 우선 진정한 자아를 순수한 사유만을 가지고 있는 정신적 존재라고 함으로써 이전의 전통적인 철학에서 주장된 유기적인 통일체로서의 인간개념을 더 이상 받아들이지 않는다. 다른 한편 이 세계는 철저히 기계론적으로 운행하는 체계로 규정된다. 이 세계의 모든 것들은 이제 여타의 구분 없이, 즉 동물과 식물, 생물과 무생물 등으로 나뉘지 않고 모두 물체로만 여겨지고, 그것들이 수량으로 측정되는 한에서 모두 동일하게 취급된다. 따라서 정신이나 영혼과 같은 것은 물질로만 존재하는 이 기계적 세계에서 추방되었다.
그런데 인간의 경우 특수한 문제가 발생한다. 하나의 인간에는 오직 사유속성만을 가진 정신실체와 오직 연장속성만을 가진 물체실체 둘이 모두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서로 독립적인 만큼 각각 정신세계의 법칙과 기계적 세계의 법칙만을 따를 텐데, 이 둘이 하나로 ‘결합’된 존재인 인간은 이제 이 두 개의 법칙 중 어느 것을 따라야 하는가라는 딜레마가 발생하는 것이다. 신체와 정신이 만약 서로 아무런 관계도 없이 병존만 한다면 이 난점을 벗어나기 어려울 것이다. 그래서 데카르트는 인간의 신체가 기계적 세계의 법칙에 따르지 않고 마음의 의지와 결정에 따라서 행동할 수 있다는 해결책을 내놓는다. 정신이라는 원인에 의해서 신체적 행동이 결과한다는 이 관계를 설명하기 위해서 그는 뇌의 뒷부분에 ‘송과선’이라는 인체의 기관이 있어서 이것이 정신과 육체를 연결해 준다는 가설을 끌어들인다. 그리 환영받지 못한 이 가설을 통해서 전개된 데카르트의 이론은 ‘심신상호작용설’이라고 일컬어진다.
인간에서는 정신과 신체가 상호 관계하지만 사실상 그는 신의 영역과 물체의 기계적 세계, 그리고 정신의 세계라는 세 가지 차원의 세계를 서로 독립적으로 분리한 셈이다. 그래서 그의 인간관은 “기계속의 유령”과 같은 말로 조롱되기도 하였다. 세계를 하나의 전체로 보는 합리론적 관점에서는 그의 이런 설명은 더더욱 받아들여지기 어려웠기에 이후의 합리론자들인 스피노자와 라이프니츠는 그의 이론에서 대두된 이 어려움을 피할 수 있는 새로운 이론을 내세우려고 노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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