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

사회의 개념과 공리주의

Jay22 2017. 1. 20. 1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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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회의 개념

 

1)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적 인간관

 

사회라는 말은 본래 아리스토텔레스의 인간에 대한 정의인 정치적 동물(zoon politikon)”이라는 표현에서 나왔다. politikonpolis, 즉 도시 국가라는 원래의 뜻에서 파생된 말이니 처음부터 국가와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었다. 이 말이 후에 라틴어로 번역되면서 사회적 동물(animal sociale)’이라는 말이 됐으므로, 결국 국가’, ‘정치(공동체)’, ‘사회라는 용어들은 공통의 기반으로부터 유래한 개념들이라고 볼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인간을 정치적 동물이라고 한 것은 두 가지 이유에서이다. 첫째, 그는 인간이 그 자연적 본성상 무리를 떠나서 살 수 없다고 보았다. 쉽게 말해 인간은 혼자 있으면 불안하고 외롭다고 느껴서 의례 다른 인간들을 찾기 마련이라는 의미이다. 하지만 두 번째로 이 말 속에는 인간이 다른 그 어떤 동물들보다도 고도의 군집생활을 할 수 있고, 하고 있는 존재라는 의미가 또한 들어 있다. 물론 사자나 원숭이들도 무리를 이루어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인간의 모임이 더 높은 수준의 공동체를 이룬다는 데에는 이견이 없을 것이다. 흥미로운 점은, 아리스토텔레스가 그 근본이유를 인간의 언어구사 능력에서 찾는다는 데에 있다. 다시 말해 겉으로 보이는 것들, 예를 들어 웅장한 파르테논 신전이나 거대한 피라미드를 갖고 있기 때문에 인간의 공동체가 수준 높은 것이 아니라, 고작(?) 언어를 통한 복잡한 의사교환이 가능하다는 점 때문에 인간사회가 다른 동물들의 사회보다 위대하다는 것이다. 크게 두드러져 보이지도 않는 언어활동을 아리스토텔레스는 왜 중요하게 여겼을까? 그것은 바로 이를 통해서 인간 삶과 인간사회의 근본적인 가치들, 즉 정당한 것과 부당한 것, 선한 것과 악한 것 등에 대한 구성원 각자의 의견과 생각을 교환하거나 공유하는 것, 심지어 합의하는 것까지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런 중요한 가치에 대한 의사교환과 잇따르는 (어느 정도의) 합의에 의해 그 공동체는 정체성과 나아갈 방향성을 얻는 것이다. 따라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언어를 통해 형성된 정신적 공감대가 사회와 국가라는 공동체를 형성하는 가장 중요한 토대가 된다고 본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렇게 정치적 공동체의 기반을 단순한 재화도 아니고, 많은 인구수도 아닌, 언어와 의견 교환을 통한 공동의 선에 대한 합의 능력과, 또한 이를 실현하기 위한 의지라고 보았기 때문에, 국가 구성원의 자격 또한 정의와 불의, 선과 악을 분별하는 능력이라고 생각했다. 이를 식별하고 또 실천할 수 있는 사람, 그의 말을 빌리자면 자유로운 자만이 국가라는 공동체의 구성원, 즉 시민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당시 노예나 여성 등은 정치에 참여할 수 없었고 이를 신분제 사회의 한계라고 비판해야 마땅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들이 교육을 받지 못했고, 따라서 이성적 사고능력이 부족하다는 이유에서 이들을 자유롭지 않은 자로 분류했다는 점에 주목하면 국가의 진정한 구성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 우리 사회도 미성년자나 다른 이유에서 지적 능력이 부족한 사람들,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을 빌리자면- ‘자신의 미욱함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롭지 못한 자들에게 정치적 참여권을 제한하는데 이 역시 같은 맥락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고, 표면적으론 그렇지 않은 보통선거권자들도 위에서 말한 의미로 자유롭게판단하여 자신의 의사를 정치적으로 반영하지 못한다면, 예를 들어 혈연, 지연 등 갖가지 비이성적 조건으로 인해 분별없이 투표를 한다면 국가의 구성원이라고 불릴 자격이 사실은 없을 것이라는 점을 생각해 볼 수 있겠다.

 

2) 근대의 시민사회

 

근대의 사상가들이 수립하고자 한 새로운 사회 개념을 우리는 시민사회(societas civilis)’라고 부른다. 홉스는 일종의 시민 연합체인 국가, 혹은 시민사회가 이전의 자연 상태를 일신했다고 보았다. 본래의 자연 상태에서 인간은 서로가 서로와 경쟁하며 배척하는, 이른바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을 하기 마련인데, 시민들이 연합하여 국가를 형성함으로써 이 상태가 종식되었다는 것이다. 반면 루소와 로크는 자연 상태를 만인이 자유롭고 평등한 상태로 보았는데, 그들 역시 이것이 전쟁 상태로 추락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시민들의 자유로운 계약에 의해 시민정부가 수립되고 그로부터 국가가 성립했다고 서술한다. 루소는 국가가 성립하게 된 배경으로 시민들의 사회 계약(contrat social)’을 들었으며, 칸트 또한 시민들의 자유로운 계약이 시민사회 구성의 원동력이 되었다고 보았다. 물론 이런 계약이 역사상 실제로 있었다고 주장하는 이는 아무도 없다 그것은 일종의 암묵적인 무언의 사상적 동의와 공감에 가깝고 사회와 국가의 성립에 대한 정신적인 기반이 무엇이었을지 묻는 철학적인 성찰일 뿐이다.

 

이렇게 형성된 근대의 시민사회 개념은 오늘날의 국가에서도 여전히 정치적 공동체로서의 사회가 갖는 기본 성격을 나타내는 중요한 개념으로 기능하고 있다. 일례로 1776년의 미국 독립선언문이나 1789년의 프랑스 혁명 때 발표됐던 인간 및 시민의 권리선언과 같은 중요한 정치적 선언에는 이러한 시민사회의 이념이 잘 나타나 있다. 서구와 세계 곳곳의 자유민주주의국가이론은 바로 이러한 이념 위에 형성된 것이다.

 

미국의 독립선언문(1776)

 

우리들은 다음과 같은 것을 자명한 진리라고 생각한다. , 모든 사람은 평등하게 태어났으며, 조물주는 몇 개의 양도할 수 없는 권리를 부여했으며, 그 권리 중에는 생명과 자유와 행복의 추구가 있다. 이 권리를 확보하기 위하여 인류는 정부를 조직했으며, 이 정부의 정당한 권력은 인민의 동의로부터 유래하고 있는 것이다. 또 어떠한 형태의 정부이든 이러한 목적을 파괴할 때에는 언제든지 정부를 변혁 내지 폐지하여 인민의 안전과 행복을 가장 효과적으로 가져올 수 있는, 그러한 원칙에 기초를 두고 그러한 형태로 기구를 갖춘 새로운 정부를 조직하는 것은 인민의 권리인 것이다. ”

 

인간 및 시민의 권리 선언’ (1789.8.26)

 

1인간은 나면서부터 자유로우며 평등한 권리를 가진다.”

2모든 정치적 결합의 목적은 인간의 소멸시킬 수 없는 자연권의 보존이다. 그 권리는 자유, 재산, 안전 및 압제에 대한 저항이다.”

3모든 주권의 원리는 본질적으로 국민에게 있다.”





2) 공리주의(Utilitarianism)

 

- 흄의 도덕이론

 

공리주의는 영국의 경험론적 전통에서 유래한다. 먼저 흄은 도덕이라는 것이 이성에서 도출되는지 감정에서 도출되는지를 묻고는 감정에 도덕의 바탕이 있다고 주장한다. 경험론자인 흄은 이성이 사실의 내용과 관련하여 어떤 확실한 지식도 제공하지 못하는 것처럼 인간 행위의 문제에 있어서도 어떠한 결정적인 역할도 하지 못한다고 보았다. 우리의 이성은 기껏해야 어떤 목적에 대한 수단만을 우리에게 가르쳐 줄 수 있고, 우리에게 무엇이 유용한지를 발견하는 데에 도움을 줄 뿐이지, 무엇이 그 자체로 선한지, 선이 도대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가르쳐 주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이성은 감정·정념의 노예일 뿐이라고 했고, 덕이란 보는 이에게 기쁘게 하는 감정을 주는 심리적 행위 내지는 성질이라고 했다(악은 그 반대라고 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유쾌한 감정을 일으키는 것들과 그렇지 않은 것들을 살펴보면, 비록 도덕의 본질과 근거와 같은 추상적인 개념에 대해서는 명료하게 알 수 없지만, 무엇이 덕인지에 대해서는 확실하고 쉽게 알 수 있다고 생각했다. 칸트가 도덕의 본질과 근거를 밝혀내려고 노력한 반면, 흄은 그것을 아예 불가능한 일이라 여기고 시도조차 하지 않았는데, 이는 도덕에 관한 사람들의 일반적인 견해가 그것의 모습을 보여주기에 충분하다고 그가 여겼기 때문이다. 선의 관념과 척도를 사람의 정서에서 찾는 이런 경험주의적 윤리학의 전통은 이제 벤담에게서 공리주의라는 이름으로 다시 나타난다.

 

- 공리주의의 기본개념

 

공리주의는 영국의 철학자 벤담(1748-1832)과 밀(1806-1873)에 의해서 주장된 윤리체계로서 행위의 도덕적 가치기준을 그 행위의 유용성(utility)에 두는 이론이다. 벤담도 흄처럼 감각경험의 범위를 넘어서는 모든 종교적·형이상학적 주장들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인간에 대한 파악은 감각이 우리에게 전해주는 것들에 기초해야 한다고 말한다.

"자연은 인류를 고통과 쾌락이라는 두 주권자의 지배 아래에 두어 왔다. 우리가 무엇을 해야만 하는지를 지시하고, 우리가 무엇을 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은 오로지 고통과 쾌락일 뿐이다. 한편으로는 옳고 그름의 기준이, 다른 한편으로는 원인과 결과의 연쇄가 이 왕좌에 결부되어 있다. 고통과 쾌락은 우리가 하는 모든 일, 우리가 말하는 모든 말, 우리가 생각하는 모든 일에 있어서 우리를 지배하고 있다."

 

벤담은 쾌락과 고통이라는 이 두 요소에 의해서 심리이론을 세울 수 있을 뿐 아니라 더 나아가 이를 기초로 윤리이론까지도 만들 수 있다고 생각했다. 쾌락의 추구와 고통의 회피라는 두 요소를 기준으로 해서 과학적이고도 전반적인 이론을 정립하는 것이다. 도덕에 관한 기준으로 그가 내세우는 기준은 이제 유용성의 원리인데,

"유용성의 원리가 의미하는 바는 곧 그것이 모든 행위를, 어떤 행위든지 간에, 그 행위가 그것과 자신의 이익이 관련되는 사람들의 행복을 증가시키는 경향성을 지니는 듯이 보이는가 아니면 감소시키는 경향성을 보이는가에 따라서 그 행위를 시인하거나 부인한다는 점이다. 바꾸어 말하면 어떤 행위가 행복을 증진시키는가 그렇지 않은가에 따라 그 행위를 판단한다는 점이다."

 

이 유용성의 원리에 의하면, 옳은 행위란 바로 유용한 행위이다. 유용성이 곧 옳고 그름의 척도인 것이다. 공리주의는 따라서 일종의 목적론적 윤리체계이고 오직 행동의 결과만을 그 정당성의 기준으로 삼는다. 어떤 행위가 결과적으로 유용한지 아닌지에 따라서 그 행위가 가치 있는지 아닌지를 결정하는 것이다.

(반면 의무론적 윤리체계는 어느 행위가 도덕법칙과 의무라는 형식을 따르는지를 기준으로 해서 그 행위의 정당성을 따진다. 이렇게 이 두 입장은 동기와 결과라는 상반된 기준을 갖고서 도덕적 행동을 판단하려는 서로에게 대립적인 견해들이다.)

 

공리주의적 입장에서는 어떤 행위가 유용하다면 그 행위는 옳다(그 자체적으로 옳은 행위란 없다). 그러면 곧 어떤 목적에 유용한가라는 질문이 자동적으로 나올 것이다. 이런 행위의 목적을 공리주의자들은 본래적 가치라고 부른다. 우리의 행위들은 항상 그 어떤 본래적 가치를 가진 다른 목적을 갖고 있고 우리의 행위들 그 자체는 그에 대해서 도구와 수단이 될 수 있다. 그리고 또 다른 행위들은 이 행위들에 대해서 도구와 수단이 되고 이 행위들이 그것들의 목적이 될 수 있다. 따라서 수단과 목적의 연결고리가 끝없이 진행될 수 있다. 따라서 문제되는 어떤 행위가 옳은가 아닌가를 판가름하는 근거를 공리주의자들은 그 행위를 하는 목적이 결과적으로 그 행위로 말미암아 좋게 되는지 아닌지에 있다고 본다. 이 때 그 행위는 순전히 도구적으로 좋고 도구적으로 옳은 것이지 그 자체로 옳은 것은 아니다. 그 결과가 좋기 때문에 그 행위도 덩달아 그것을 위한 도구로서 옳게 되는 것이다.

 

- 쾌락 공리주의와 밀의 비판

 

벤담은 쾌락이 본래적 가치라 했고, 어떤 행위가 야기하는 이 유쾌한 경험(쾌락)을 그 강도와 지속성을 기준으로 해서 계산함으로써 어떤 행위가 얼마만큼 유용한지를 따질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더 많은 쾌락을 가져다주는 행위들을 함으로써 쾌락이 증진된다고 보았다. 그런데 밀은 같은 양의 쾌락들 중에서도 더 큰 본래적 가치를 주는 쾌락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바로 어떤 쾌락이 더 높은 질을 가지고 있는 경우인데, 밀은 모든 쾌락이 다 같은 질을 갖는 것이 아니라 어떤 쾌락은 더 높은 질을, 어떤 쾌락은 더 낮은 질을 갖는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 쾌락의 질이 양보다 더 본래적 가치에 가까우므로 비록 어떤 쾌락이 적은 양의 쾌락을 줄지라도 높은 질을 가졌다면 이 쾌락은 많은 양의 쾌락을 주지만 낮은 질을 가진 쾌락보다 더 큰 본래적 가치를 갖는다고 여기게 된다.

만족한 돼지보다는 불만족한 인간이 되는 것이 더 낫다. 만족한 바보보다는 불만족한 소크라테스가 되는 것이 더 낫다.”

벤담처럼 그저 쾌락의 외적인 양에만 관심을 갖는 쾌락주의적 공리주의와 비교해서 밀의 공리주의를 행복주의적 공리주의라고 부르고 있다.

 

- 최대다수 최대행복

 

공리주의에서 행위의 기준이 되는 본래적 가치(쾌락, 혹은 행복)는 그럼 누구를 위한 것인가라는 질문을 할 수 있다. 여기서 그 기준이 행위를 하는 본인이라고 대답하면 윤리적 이기주의가 되며, 가족이거나 몇몇 친한 사람들이라고 해도 역시 그와 비슷한 입장이 될 것이다. 그렇지 않고 모든 사람을 위한 쾌락과 행복이라고 대답하는 것이 바로 공리주의자의 입장이다. 공리주의는 기본적으로 각 개인의 쾌락에 대한 공평하고 보편적인 판단을 전제로 한다. 한 사람의 쾌락은 다른 사람의 쾌락과 똑같이 계산되어야 한다. 한 행위자의 이익도 다른 모든 사람의 이익과 똑같이 고려되어야 한다. 모든 인간들은 그들의 이익을 충족하는 데에 있어서 똑같은 권리를 가진다.

 

그래서 쾌락이나 불쾌함을 각각 계산 가능한(긍정적이고 부정적인) 단위로 측정할 수 있다고 보고 어느 개인이나 집단의 쾌락(과 행복)의 결과적인 전체 양을 계산하고자 한다. 이 때 기준이 되는 것은 어떤 행위가 가져다주는 쾌락의 강도, 지속성, 확실성, 신속성 등인데 이를 통해서 쾌락의 총량을 정밀하게 계산해 낼 수 있다고 공리주의자들은 믿고 있다. 그래서 한 개인의 경우, 앞서의 기준에 따라 그 사람이 느끼는 쾌락(과 행복)의 긍정적, 부정적 양의 총계를 내서 그 결과에 따라 그 사람의 쾌락(과 행복)의 정도를 가늠할 수 있다. 또한 한 집단의 경우에는, 그 집단의 구성원들 각각의 쾌락(과 행복)의 양들을 합하여 얼마만큼의 결과가 나왔는지를 계산해서 그 집단의 쾌락(과 행복)의 정도를 따질 수 있다. 이 때 한 집단의 구성원들의 쾌락(과 행복)의 정도를 증가시키거나 감소시킬 수 있는 조건들이 있을 수 있는데, 결과적으로 구성원들의 쾌락(과 행복)의 총량이 최대치가 될 수 있는 조건들이 정당한조건들이 될 것이다. 반대로 구성원들의 쾌락(과 행복)의 총량을 증가시키지 못하는 조건들은 선택돼서는 안 될 것이다.

 

이 경우 그로 인하여 한 집단의 어느 구성원들은 극단적으로 피해를 보지만 다른 구성원들은 그 쾌락(과 행복)의 양이 (더 많이) 증가하게 되는 수단이 있다면 공리주의의 입장에서는 주저하지 않고 이것을 선택하게 된다. 반대로 모든 구성원들의 쾌락(과 행복)의 양이 평등하게 분배되지만 그 총량이 앞서의 경우보다 낮다면 이 정책은 마땅히 채택될 수 없을 것이다. 바로 이와 같은 경우가 공리주의의 맹점이 지적되는 상황이 된다. 공리주의의 최대다수 최대행복의 원칙을 따르면 불가분 사회적 불평등과 불공평한 부의 재분배와 같은 문제에 직면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공리주의의 근본개념인 유용성과 사회적 정의라는 개념은 근본적으로 충돌하기 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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