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자유주의적 사회이념
1) 사회 계약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오늘날 민주주의 사회에서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는 ‘시민사회 국가’ 이론은 ‘사회계약설’이라 불리는 사상을 배경으로 삼고 있다. 홉스를 시작으로 루소, 로크 등 근대의 이론가들이 하나같이 집중해서 다루었던 이 사회계약설은 시민사회 탄생의 이론적 토대가 되었다.
루소의 경우 인간의 자연적 본성을 ‘자연 상태’, 혹은 ‘자연인’이라 하여 본래 인간은 자신에게 꼭 필요한 만큼 최소한의 욕구만을 갖고서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자족과 평등의 상태에 있었을 것이라 상정한다. 그런데 이것이 여럿이 모여 사는 사회적 생활로 접어들며 이 속에서 사회적 경험, 예를 들어 타인과의 비교 등에 의한 자기반성을 통해 인위적인 모습으로 변질된다고 보았다. 이 상태에서는 타인의 소유와 구분되는 나의 재산, 즉 사유 재산이 형성되고, 더 나아가 남보다 더 나고자 하는 경쟁의식에 의해 부를 창출하려는 노력이 생기게 된다. 이 현상이 공동체에 만연하게 되면 결국 부와 가난, 지주와 노예 등 지배와 종속의 관계와 이에 의한 사회적 불평등이 생겨난다. 이 빈부격차와 각 집단들의 욕망이 점점 상호 충돌하면 결국 전쟁상태에 접어들게 될 것이다. 전쟁이라는 극단적 갈등에 의한 위기와 손실을 최소화하기 위해 인간은 이제 최선을 다해 방책을 마련하는데, 이것이 곧 사회와 법률인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형성된 사회에서는 부와 권력을 소유하고 있는 계층이 이 불평등을 영구화하기 위해 전체주의나 절대왕권 등을 확립하고자 한다. 이를 통해 강자는 약자를 지배하려고 하는데 이는 인간의 자연권을 침해하는 것이므로 이런 상태를 방지·지양하기 위한 장치로서 사회적 계약이 필요하다고 루소는 본 것이다.
홉스의 경우 계약은 왕과 시민사이에 성립되는 반면 루소는 다수의 개인이 한 국가의 국민이 되고자 스스로 맺는, 즉 시민들 사이의 계약, 혹은 자기 자신과의 계약을 의미하고 있다. 이 경우 주권은 어디까지나 국민에게 있고(국민주권) 주권자를 선택하여 그에게 주권을 위임하는 것도 국민이다. 따라서 국민이 스스로 결정하여 실행한 이 사회계약은 자유의지에 의한 정당한 것이지 자유를 억압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기에 그 결과로 따라오는 특정한 사회적 구속이나 의무도 역시 정당성을 얻게 된다.
계약을 맺는 당사자인 개인은 하나의 개체이기도 하지만 또한 동시에 자신을 포함한 공동체의 일부분이기도 하다. 따라서 인간은 자신의 안위를 염려하는 개인으로서 ‘개별의지’도 갖지만 또한 공동체의 선을 생각하며 ‘일반의지(voloute generale)’를 갖기도 한다. 이 일반의지는 개별의지를 합쳐 놓은 ‘만인의 의지’(다수결)와는 다르며 공동체를 위해 최선의 것이 무엇일지를 먼저 고려하는 보편적인 목적을 갖고 있다. 법률과 같은 사회적 제도는 이러한 일반의지의 발현이어야 하고 개인은 (자신을 포함한) 공동체의 선을 위해 사회적 구속도 감수하는 것이다. ‘자연 상태’에서의 개인이 자연적 자유를 누리며 자연인으로 산다면 ‘사회 상태’에서의 개인은 일반의지에 의해서 통제받는 시민으로서의 자유를 가지는 것으로 구분될 수 있다.
로크도 비슷한 맥락에서 사회를 가능하게 하는 하나의 계약 개념을 생각해 보았다. 그는 먼저 국가가 성립되기 이전에 사람들이 어떤 상태였을까를 상상해 보는데, 그 때 사람들은 일종의 자연 상태에 있었을 것이라고 상정한다. 자연 상태의 사람들은 모두 자연적 권리로서 생명, 자유, 재산의 권리를 가지고 있었는데, 이 권리들은 천부적으로 가지고 있는 인권이며 다른 이에게 양도할 수 없는 성격이다. 그리고 이 상태의 사람들은 본래 완전한 자유의 상태이자 평등의 상태이다.
먼저 이 상태에서 사람들은, “타인의 허락을 구하거나 타인의 의지에 구애받지 않고, 자연법칙의 테두리 안에서 스스로 적당하다고 생각하는 바에 따라서 자신의 행동을 규제하고 자신의 소유물과 일신을 처분할 수 있는 완전한 자유의 상태”에 있고, “또한 그 안에서 모든 권력과 권한이 호혜적이며, 어느 누구도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이 갖지 않는 평등의 상태”에 있다고 로크는 얘기한다.
이 자연 상태에서 사람들은 어떤 종류의 지배-종속 관계도 없고, 자신의 소유와 권력에 있어서 다른 사람들과 동등하다. 그런데 이 자연에는 일종의 법이 있어서 이 자유가 무질서나 방종의 상태로 치닫는 것을 막는다고도 생각했다(=자연법 사상). “바로 법인 이성은 의논을 바라는 모든 인류에게, 인간은 평등하고 독립적인 존재자이므로 어느 누구도 다른 사람의 생명, 건강, 자유 또는 소유물에 해를 끼쳐서는 안 된다고 가르친다.”
이러한 자연 상태가 변하게 되는 계기는 사유재산의 발생이라 할 수 있다. 최초의 자연 상태에서 자연은 만인의 공동 소유물이자 공동자산이었다. 이에 대해 그 어느 누구도 사적인 지배권을 갖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은 자신의 신체와 그 신체에 의한 노동의 결과물에 대해서는 (배타적인) 소유권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자연을 가공하고 그로부터 얻은 결실에 대해 자신의 소유, 즉 재산이라고 주장하게 된다. 자신의 노동에 의해 변형된 자연의 일부분은 더 이상 공유의 상태에 놓여 있지 않고 타인의 공동권리 또한 배제된다. 이 사유재산의 정당성과 그에 대한 권리는 시민사회 형성의 중요한 기반이 된다.
“그 자신의 주인으로서, 곧 그의 일신과 행위와 노동의 소유주로서 인간은 그 자신 안에 소유권의 주된 원천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발명과 기술을 통하여 삶의 편익을 개선했을 때, 그가 자신을 부양하고 편리하게 하기 위해서 사용한 것의 대부분을 이루는 것은 전적으로 그의 것이며, 다른 사람과의 공유물이 아니다.”
하지만 인간 사회는 인간의 이기적인 속성 탓에 타인의 정당한 권리와 재산을 침해하여 그들을 부당하게 지배하려는 일종의 전쟁 상태로 빠지게 된다. 이 전쟁 상태를 해소하기 위하여 사람들은 이제 상호 협약을 맺어 공동체를 세우고, 그 협약에 스스로 종속하게 된다. 시민으로부터 주권을 위임받은 정부는 입법권과 집행권을 가지고서 공공선을 위하여 주어진 권한을 행사하며, 이에 동의한 시민들은 제정된 법에 의해 보호도 받고 또한 그 법에 복종도 하는 것이다. 이렇게 로크도 사회의 형성을 루소와 유사하게 하나의 계약적 연대에 의한 것으로 바라보았는데, 루소보다 더 구체적인 제도적 장치와 과정까지 이론적으로 고찰함으로써 오늘날 시민사회 국가이론의 대체적인 윤곽을 그려내게 되었다.
<인식론의 쟁점>
근대에 와서 중심 주제로 부각된 인식론은 인식, 혹은 지식 일반의 근본 문제들을 다루는 철학의 한 부문이다. 그 중 인식의 기원에 관한 이론들은 다음과 같고 이를 중심으로 근대 철학자들의 사상을 정리해 볼 수 있다.
인식의 기원에 관한 이론들
1) 경험론 (empiricism)
경험론자들은 오관에 의해 제공되는 경험을 그들의 인식론의 기초로 삼았고 인간의 지식은 감각경험을 통해서 얻어진다고 주장한다. 존 로크는 우리 인간의 이성은 태어났을 때는 백지(tabula rasa)와 같다고 했다. 아무런 감각 자료가 새겨져 있지 않은 인간의 의식은 이제 생활하면서 많은 감각적 인상을 획득하게 된다는 것이다.
2) 합리론 (rationalism)
합리론자들은 인간에게는 경험에 앞서는 선험적인 인식원리가 있다고 주장한다. 우리 인간에게는 자명한 명제들(예: 모순율과 같은 논리적 규칙, 수학적 공리 등)이 있는데, 이 관념들은 학습할 수도 없고 우리가 임의대로 만들어 낼 수도 없다. 이 원리들은 경험에 앞서는, 즉 선험적인 것이다. 경험은 오히려 이 원리들에 의해서 이해되는 것이다. 따라서 지식은 지성의 영역에서 산출되며 참된 지식은 이미 관념의 형식으로 우리에게 존재한다.
합리론(이성론)
경험론자들이건 합리론자들이건 근대 철학자들이 가장 큰 관심을 갖고 있었던 것은 확실한 지식으로서의 참된 진리였다. 그들은 분명해서 흔들리지 않는 지식의 가능성을 확보하는 것을 최고의 목표로 삼았다. 그것을 획득하는 조건과 방법에 대한 생각에 있어서 이제 경험론자들과 합리론자들의 길이 갈리는 것이다.
먼저 경험론자들은 그 지식이 실재하는 대상과 합치하는지의 여부에 따라 그 지식의 확실성이 보장된다고 보았다. 그래서 그들은 인식의 내용, 즉 우리의 관념을 우선 감각 경험과 비교해 보는데 만약 그 관념이 경험에 근거해서 생성되었다고 입증되면 그것은 실재적이고 정당한 지식으로 인정된다.
반면 합리론자들은 진리의 근거를 이성, 혹은 합리성에서 찾는다. 그들은 우리의 이성이 명증적이라고 여기는 지식들만을 확실하고 정당한 것으로 여긴다. 어떤 지식이 명증적인지 여부는 오직 이성만이 판단하고 경험에 의한 입증이나 실재와의 대응은 중요한 근거가 아니다. 형식적인 측면에서 보자면 동일률, 모순율, 배중률과 같은 논리적 법칙들은 명증적이다. 그것의 정당성을 이성적으로 의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것들은 사고의 형식적인 규칙들에 불과하므로 세계와 관련된 지식들 중 명증적인 지식에 대한 규정은 더 구체적이어야 한다. 따라서 합리론자들의 노력은 명증적인 것이라고 확보된 개념과 원리들을 외부 세계의 현실과 조화시키는 데에 집중된다.
최초의 합리론자라고 불리는 데카르트는 명석하면서도 동시에 판명한 지각의 상태를 명증적이라고 규정했다. 명석하다는 것은 우리 정신이 인식 대상의 구성요소를 하나하나 세심하게 알아서 분명하게 파악하고 있을 때를 지칭하며, 판명하다는 것은 정신이 그 대상을 다른 대상과 확연하게 구분할 수 있을 때를 가리킨다. 이때 명석함의 반대말은 애매하다는 것이고 판명함의 반대말은 혼잡한 것이다. 이에 의하면 어떤 인식의 내용이 불분명하거나 애매하지 않고 내 의식에 그것이 무엇인지 뚜렷이 나타나면서 다른 인식들과 뒤엉켜 있지 않게 분명히 나타나는 그런 상태에 있다면 그 지식은 명증적인 것이다. 합리론자들은 우리의 이성적 사고와 반성을 통해서, 문제되는 어떤 지식이 위와 같은 상태라고 여겨질 때 주저 없이 그것을 명증적이라고 판단하고, 오직 그런 것들만을 정당하고 확실하고 참된 지식으로 인정한다. 이것이 합리론자들의 기본 입장인데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이런 지식을 가질 수 있는지, 그리고 이를 통해서 어떤 성과를 얻을 수 있는지 우선 데카르트의 경우를 예로 들어 살펴보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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