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라라랜드 영화 후기

Jay Tech 2017. 1. 12. 2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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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시작하면서


본론으로 들어가기 전에 먼저 알아두어야 할 고전이 있습니다. 약 1세기 전 예술에 대해 고민했던 두 철학자가 있었는데 그들은 각자 자신의 저서에서 당대 이전의 예술과 당대 이후의 예술에 대해 저술하였습니다. 두 철학자와 저서의 내용을 간략하게 손, 발, 팔, 다리, 어깨, 무릎을 다 잘라서 몇 문장으로 축약한다면 다음과 같습니다.


'테오도르 아도르노'의 '문화산업론' : 문화에 자본이 투입되면 예술은 타락한다. 누군가는 예술작품으로 장사를 하려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대중문화란 소수 자본가들이 대중을 길들이고 착취하는 수단에 불과하며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예술을 앞세워 돈놀이를 하게 하는 자본주의를 버리고 사회주의로 돌아가 예술을 예술로서 보존해야한다.


'발터 벤야민'의 '기술복제 시대의 예술작품' : 예술의 역사에서 가장 충격적인 사건이 발생했다. 바로 카메라의 발명이다. 카메라 이전의 예술작품에는 아우라가 존재했다. 모든 예술작품이 유일무이한 존재로 인간은 오직 유한한 시간과 공간 속에서만이 예술을 침잠할 수 있었다. 그러나 기술의 발전은 예술작품의 아우라를 파괴했다. 카메라(사진)는 그림의 아우라를 파괴했고, 영상기술(영화)은 연극의 아우라를 파괴했고, 녹음기술(디지털음악)은 연주의 아우라를 파괴했다. 하지만 우리는 예술작품의 복제로 또 다른 예술의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다. 지금까지의 예술이 신앙(종교)을 종용하는 주술적 도구로서 엄숙하고 깊은 침잠에 의한 자기성찰의 도구였다면 앞으로의 예술작품은 우리가 한 발짝 떨어져서 그것을 관람하고, 지켜보고, 즐기고, 어쩌면 유희와 쾌락을 위한 도구로도 사용할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해본다.


요약 : 19세기말에 이르러 인간은 카메라를 발명하며 카메라는 예술을 복제하기 시작했고 어떤 사람은 그리하여 예술이 곧 멸종하고 예술의 탈을 쓴 질 낮은 대중문화들이 자본의 힘으로 대중을 기만할 것이라 했으며 어떤 사람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예술작품을 대하는 태도를 달리하여 예술작품이 즐거움을 위한 도구로 사용될 수 있지 않을까 기대했음


2. 주제


서론부터 꽤 따분한 글로 시작을 했습니다. 언뜻보면 너무나 사랑스럽기만 한 이 영화의 주제는 꽤 따분한 그 고전과 궤를 함께 합니다. 사실 대중문화에 관심이 없으신 분들도 잘은 모르겠지만 예술이라고 말하면 뭔가 높은 수준의 미학적 지식이 동반되어야 하거나 예술의 값어치라는 잣대를 무의식적으로 들이대 귀족들이나 사유할 수 있는, 보편적인 인간의 삶을 초월하는 어떤 것으로 인식되어 오는 반면 대중문화라하면 예술보단 조금 더 친근하고 우리가 늘상 즐겨오는 것들을 떠올리고 가볍게 소비되는 것들을 연상하게 됩니다. 그런식으로 우리는 자연스럽게 예술과 대중문화의 상하관계를 나도 모르게 지어버리게 됩니다.



여기 이 수많은 전문가들과 관람객들의 호평을 받고 있는 대중문화 라라랜드는 오늘날의 예술의 의미에 대해 재고합니다. 그렇습니다. 이 영화는 '예술이라는 꿈을 향한 길이 꽉 막혀있는 두 남녀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에 대한 영화입니다.


이 영화는 시종일관 '오늘날의(현실에서의) 예술의 의미'라는 주제를 어필하면서 우리 삶 곳곳에 뿌리내린 자본의 손아귀을 냉소적으로 보여줍니다. 주목할 점은 영화 내내 사랑을 나누는 두 주인공이 서로 상반된 예술에 대한 캐릭터를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세바스찬은 물질적인 가치에 탐닉하는 인물이 아닙니다. 존경하는 뮤지션이 앉았던 나무 의자를 더 없이 소중히 여기면서도 비록 자기 자신이 직면한 현실적인 문제인 세금 고지서나 레스토랑 보스의 선곡은 안중에도 없습니다. 반면 미아는 영화가 시작될 당시 백수였던 세바스찬과 달리 커피숍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습니다. 무려 경제활동을 하고 있었던 것이죠. 이러한 설정은 세바스찬이 자본주의를 거부하는 이단아라는 것을 보여주며 미아는 자본주의에 충성하는 보편적인 우리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연장하여, 두 주인공이 모두 예술에 대한 열정으로 꿈을 향해 나아가고는 있지만 세바스찬은 자본과 제도에 도전하는 예술가 모델이었고 미아는 자본과 제도에 순응하는 예술가 모델이었습니다. 세바스찬의 예술적 자아실현은 오로지 오리지널 클래식 재즈뮤직의 부활로 '남이 하지 않으면 내가 한다'와 같은 꽤나 저돌적인 자세를 취하였고 미아의 예술적 자아실현은 오디션을 패스하는 것. 즉, 이 분야의 권위자에게 인정 받는 것 그 뿐이었습니다.



영화 초반 이렇게나 달랐던 두 남녀는 서로를 만남으로서 조금씩 변화하게 됩니다. 순수예술과 상업예술의 사랑을 그리는 이야기는 사랑의 지극히 인간적인 면과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결코 변하지 않는 사랑의 순수함을 보여줍니다.(처음에는 말이죠.) 하지만 가치가 충돌합니다. 세바스찬은 미아를 만나면서 월드투어나 화보촬영 등을 해가며 돈을 벌기위해 노력하고 미아는 세바스찬을 만나면서 무비스타가 아닌 모노드라마에 도전합니다. 극중 세바스찬은 자신이 인정하는 재즈연주를 하는 레스토랑(인지 카페인지 정확히 기억은 안나지만)에 데려가 재즈에 대해 열변을 토합니다. 그 내용인 즉, 재즈는 매 연주마다 새로운 음악이 탄생한다. 즉 이것이 녹음되고 보정되어 복제되는 음악양식이 아닌 연주 그 자체의 아우라에 대한 가치를 설명하는 것이었는데 아마도 미아는 이 계기로 재즈음악에 대한(또는 예술의 아우라에 대한) 인식의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을 것 같습니다. 어쨌든 너무너무 서툴고 어설픔에도 '사랑'을 위해 두 사람은 어느정도의 '불편함'을 감수하면서 그것을 지켜나갈 수 있을 것만 같았지만 냉정한 현실은 결국 세바스찬의 사랑을 외면하고 맙니다.


오디션에 번번히 낙방하던 미아는 모놀로그(아우라의 양식)를 통해 비로소 그토록 바라던 권위자의 인정(제도)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그 꿈을 성취한 기쁨은 아마 오래가지 못했을 것입니다. 사회 곳곳에 뿌리내린 자본주의의 영향력 속에서 한 사람의 예술가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참담하기 그지 없을 것입니다.


미아는 이 영화가 시작하는 시점에만 해도 자신 앞의 꽉막힌 길을 피해가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누가 뭐라해도 자신의 차선을 지키는 그런 사람이었지만 세바스찬이라는 예술을 겪고 어쩌면 평생에 단 한번, 다시 오지 못할 오디션의 성공 이후로 그녀는 자신 앞의 장애물을 피해가고 더 나은 길이 있다면 어렵지 않게 차선을 바꾸는 타협할 줄 아는 유연한 사람이 되어 있었습니다. 오디션 후 5년의 시간 동안 자신이 꿈꾸던 무비스타가 되는 과정에서 그녀는 계속해서 이러한 타협을 해왔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타협들은 재즈 음악을 열렬히 사랑했던 또 그런 재즈 음악만큼이나 미아 자신을 사랑해주었던 어떤 아티스트 대신, 자본가인지 권력가인지 묘사는 되지 않았지만 적어도 예술가는 아닌 듯한 이 영화와 어울리지 않는 그런 남자와 가정을 꾸리도록 미아를 이끌었을 것입니다.


사실 앞서 언급한 고전은 지금의 대중문화를 공부하는 학생들의 바이블로 손꼽히며 사랑받는 유명한 저서들로 오늘날 더욱 재조명하고 있는 철학자는 발터 벤야민이라고 합니다. 이유인 즉 약 110년 전, 카메라가 발명된 그 당대에 예견한 예술작품에 대한 그의 기대가 실제로 현재의 예술작품이 갖는 의의와 어느정도 일치하고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렇기 때문에 '영화는 연극보다 급이 낮은 장르이며 예술도 아니다' 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연극은 연극 나름의 예술이며 영화 또한 영화 나름의 다른 예술로 봐야한다. 오랜 예전에 중요하게 여겨지던 '아우라'와 같은 가치를 100년이 훨씬 지난 지금까지 요구해야하고 또 고수할 수는 없는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스마트폰을 사용하는 이 시대에 라이브 연주만이 예술이라니..라고 바라보는 것이죠.


물론 오늘날 거대 자본이 예술을 가지고 대중을 기만하는 것도 분명히 직시해야할 사실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존 레전드와의 에피소드는 적절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특히 '꾸며낸 예술의 표정을 기록하는 카메라' 라는 현실 속 대중문화의 의미는요.


이러한 상황 속에서 영화가 내리는 결론은 어쩌면 우리에게 남은 마지막 아우라는 다름 아닌 각자의 '삶(Life)' 이다. 라고 말하는 듯 합니다. 영화의 결론부, 세바스찬은 미아라는 예술를 재구성합니다. 매 순간마다 그래야했으나 그러지 못했던 지나간 시간들을 상상하며 결코 돌이킬 수 없는 이 세상에서 그야말로 유일무이한, 첨단의 과학기술로도 복제할 수 없으며 억만장자의 돈으로도 살 수 없는 단 하나의 가치인 '삶'이야말로 인간이 오늘날 영위할 수 있는 최후의 아우라(그 과정이 비록 현실 앞에서 비루할 지라도)라고 말하는 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재즈도 마찬가지입니다. 연주 중 실수를 했더라도 그 음악은 그것대로 하나의 빛나는 예술임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다만 슬픈 점은 되돌릴 수 없는 인생이기에 그것이 예술일 수 있다는 점일 것입니다.


3. 장면



가장 감동적이면서 가히 최고라고 말할 수 있는 장면을 뽑자면 세바스찬을 찾아 상영관 안에서 앞으로 나아가 스크린으로 쏟아지는 영화를 온 몸으로 받아내며 무대 위에 서고 싶은 미아 자신의 꿈과 그렇지만 그건 꿈일 뿐인 비참한 현실과 미아의 현재였던 연극이라는 아우라와 미아의 미래인 영화라는 오늘날의 예술이 대사 한 마디 없는 이미지로 동시에 뒤섞여 노출되며 마치 보는 이의 여러 감정이 혼합되는 것만 같이 표현되는 연출에 감탄했습니다.


뮤지컬로 시작하는 이 영화의 첫 장면은 영화의 거의 모든 설정과 진행 방향을 함축적으로 담고 있습니다. 두사람의 첫 만남은 자동차 경적소리와 함께 시작됩니다. 미아에게 세바스찬은 경적을 의미합니다. 미아가 현실에 막혀있을 때마다 그는 끊임없이 곁에서 '지금 뭐해, 빨리 나아가라!' 라고 경적을 울리는 그런 존재였습니다. 그렇기에 영화는 그가 오디션 소식을 전하려고 미아의 집을 찾아가 깊은 밤에 경적을 울리는 일에 단순한 깽판 이상의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것입니다. 


또한 이 영화는 영화의 의미면을 떠나서 영화의 기술적 측면에서도 탁월합니다. 한 장면만 뽑자면 감독의 카메라를 다루는 솜씨를 볼 수 있었던 영화 초반부 룸메이트들과 나갔던 나이트 파티에서의 분수대 스위밍 풀 장면에서 수중과 수면을 넘나드는 카메라 무빙으로 전해지는 쾌감이 가장 기억에 남습니다.


탄탄한 연기력과 숱한 연습으로 만들어낸 곳곳의 롱쇼트 구성들은 더할나위 없이 완성도가 높았습니다.


4. 대사


공식 트레일러에서도 등장하는 미아의 오디션 대사는 제도가 대중에게 강요하는 압박을 전하는 대사로 느껴졌습니다. Two options, you either follow my rules or follow my rules(두 가지 선택권이 있다. 날 따르던지 아니면 날 따르던지)..에 '됐어요' 라면서 말을 잘라버리는 면접관(자본의 대변인이자 제도의 상징)의 답변에 미아는 '다르게 해볼게요'라고 말합니다.


'당신이 나의 룰에는 따를 수 없겠지만 이게 싫다면 내가 다른 방법으로도 해볼게요.'라고 어필해봐도 자본과 제도는 미아에게 잔인하기만 합니다. 정교하게 세팅되어있는 사회법칙은 개인에게 다른 방법(돌파구) 따위 허락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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