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간과 지식 >
<인식론의 쟁점>
근대에 와서 중심 주제로 부각된 인식론은 인식, 혹은 지식 일반의 근본 문제들을 다루는 철학의 한 부문이다. 그 중 인식의 기원에 관한 이론들은 다음과 같고 이를 중심으로 근대 철학자들의 사상을 정리해 볼 수 있다.
인식의 기원에 관한 이론들
1) 경험론 (empiricism)
경험론자들은 오관에 의해 제공되는 경험을 그들의 인식론의 기초로 삼았고 인간의 지식은 감각경험을 통해서 얻어진다고 주장한다. 존 로크는 우리 인간의 이성은 태어났을 때는 백지(tabula rasa)와 같다고 했다. 아무런 감각 자료가 새겨져 있지 않은 인간의 의식은 이제 생활하면서 많은 감각적 인상을 획득하게 된다는 것이다.
2) 합리론 (rationalism)
합리론자들은 인간에게는 경험에 앞서는 선험적인 인식원리가 있다고 주장한다. 우리 인간에게는 자명한 명제들(예: 모순율과 같은 논리적 규칙, 수학적 공리 등)이 있는데, 이 관념들은 학습할 수도 없고 우리가 임의대로 만들어 낼 수도 없다. 이 원리들은 경험에 앞서는, 즉 선험적인 것이다. 경험은 오히려 이 원리들에 의해서 이해되는 것이다. 따라서 지식은 지성의 영역에서 산출되며 참된 지식은 이미 관념의 형식으로 우리에게 존재한다.
합리론(이성론)
경험론자들이건 합리론자들이건 근대 철학자들이 가장 큰 관심을 갖고 있었던 것은 확실한 지식으로서의 참된 진리였다. 그들은 분명해서 흔들리지 않는 지식의 가능성을 확보하는 것을 최고의 목표로 삼았다. 그것을 획득하는 조건과 방법에 대한 생각에 있어서 이제 경험론자들과 합리론자들의 길이 갈리는 것이다.
먼저 경험론자들은 그 지식이 실재하는 대상과 합치하는지의 여부에 따라 그 지식의 확실성이 보장된다고 보았다. 그래서 그들은 인식의 내용, 즉 우리의 관념을 우선 감각 경험과 비교해 보는데 만약 그 관념이 경험에 근거해서 생성되었다고 입증되면 그것은 실재적이고 정당한 지식으로 인정된다.
반면 합리론자들은 진리의 근거를 이성, 혹은 합리성에서 찾는다. 그들은 우리의 이성이 명증적이라고 여기는 지식들만을 확실하고 정당한 것으로 여긴다. 어떤 지식이 명증적인지 여부는 오직 이성만이 판단하고 경험에 의한 입증이나 실재와의 대응은 중요한 근거가 아니다. 형식적인 측면에서 보자면 동일률, 모순율, 배중률과 같은 논리적 법칙들은 명증적이다. 그것의 정당성을 이성적으로 의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것들은 사고의 형식적인 규칙들에 불과하므로 세계와 관련된 지식들 중 명증적인 지식에 대한 규정은 더 구체적이어야 한다. 따라서 합리론자들의 노력은 명증적인 것이라고 확보된 개념과 원리들을 외부 세계의 현실과 조화시키는 데에 집중된다.
최초의 합리론자라고 불리는 데카르트는 명석하면서도 동시에 판명한 지각의 상태를 명증적이라고 규정했다. 명석하다는 것은 우리 정신이 인식 대상의 구성요소를 하나하나 세심하게 알아서 분명하게 파악하고 있을 때를 지칭하며, 판명하다는 것은 정신이 그 대상을 다른 대상과 확연하게 구분할 수 있을 때를 가리킨다. 이때 명석함의 반대말은 애매하다는 것이고 판명함의 반대말은 혼잡한 것이다. 이에 의하면 어떤 인식의 내용이 불분명하거나 애매하지 않고 내 의식에 그것이 무엇인지 뚜렷이 나타나면서 다른 인식들과 뒤엉켜 있지 않게 분명히 나타나는 그런 상태에 있다면 그 지식은 명증적인 것이다. 합리론자들은 우리의 이성적 사고와 반성을 통해서, 문제되는 어떤 지식이 위와 같은 상태라고 여겨질 때 주저 없이 그것을 명증적이라고 판단하고, 오직 그런 것들만을 정당하고 확실하고 참된 지식으로 인정한다. 이것이 합리론자들의 기본 입장인데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이런 지식을 가질 수 있는지, 그리고 이를 통해서 어떤 성과를 얻을 수 있는지 우선 데카르트의 경우를 예로 들어 살펴보기로 하자.
데카르트 (René Descartes, 1596 – 1650)
『방법서설』 (Discours de la méthode, 1637)
『제1 철학에 관한 성찰』 (Meditationes de Prima philosophia, 1641)
데카르트는 우리가 절대적으로 확실한 지식을 갖는 것은 모든 형태의 회의주의를 논파해야만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그가 활동했던 근대 초기는 -이미 아는 바와 같이- 기독교의 유일한 절대 권위가 지배했던 중세시대가 막을 내리면서 르네상스라는 과도기를 거쳤던 회의주의와 혼란이 극대화된 상태였다. 하지만 이런 시대적 상황에 대한 반동으로 확고한 지식에 대한 열망이 그 어느 때 보다도 강했던 것 또한 사실이다. 로크 역시 비슷한 동기를 가졌는데 그는 경험론적 방법론으로써 이를 시도했다면, 데카르트는 이제 합리적 절차를 통해서 이를 얻으려 한다. 흄과 같은 경우도 비록 그 결말은 회의적인 방향이었지만 애초에는 이런 확실한 지식의 가능성을 확인하려 한 시도였다고 볼 수 있다.
1. 이성 사용의 규칙
데카르트는 그런데 회의주의자들과는 달리 처음부터 모든 인간은 자연적으로, 그리고 그 본성상 이성을 소유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진리에 이르는 길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다는 생각과 그런 보편적인 인식능력에 대한 믿음을 그는 처음부터 갖고 있었다. 그래서 당시 팽배했던 회의주의와 관련해서도 이런 혼란이 인간정신의 본성, 즉 이성에게 결함이 있기 때문에 야기됐다고 생각하지 않았고 단지 인간이 그 이성을 잘못 사용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진리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이성을 단지 소유하기만 해서는 안 되고 이를 올바로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이 이성을 잘 사용할 수 있을까 하는 방법론에 우선 관심을 가졌다. 이런 배경에서 그가 생각해낸 이성의 올바른 사용을 위해 지켜야 할 규칙들은 다음과 같다.
첫째, 명증성의 규칙.
명증적으로 참이라 인식한 것 외에는 무엇도 참된 것으로 받아들이지 말 것. 속단과 편견을 신중히 피하고 의심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명석 판명하게 내 정신에 나타난 것 외에는 그 어떤 것에 대해서도 판단하지 말 것.
둘째, 분해의 규칙.
검토해야 할 어려움들을 각각 잘 풀 수 있도록 가능한 한 작은 부분들로 나눌 것.
셋째, 종합의 규칙.
가장 단순하고 알기 쉬운 대상에서 출발하여 계단을 오르듯 조금씩 올라가 가장 복잡한 것을 인식하는 데에까지 이를 것. 순서가 없는 것들에 대해서도 순서를 설정하여 나아갈 것.
넷째, 열거의 규칙.
아무 것도 빠뜨리지 않았다는 확신이 들 때까지 완벽한 열거와 전반적인 검사를 어디에서나 행할 것.
데카르트는 참인 것으로 완전하게 신뢰할 수 있는 지식을 얻으려면 위와 같은 방법으로 탐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데카르트의 방법 가운데 명증성을 강조하는 첫 번째 규칙이 가장 중요했는데, 그것이 모든 지식들의 시작이고 출발점이고 전제이기 때문이다. 이제 이런 명증적인 지식을 얻기 위한 방법으로서 그가 채택한 것은 모순되게도 ‘회의’라는 것이었다. 회의가 모든 철학적 성찰의 출발이자 필수 불가결한 구성요소인 이유는 우선 상식과 이론 사이의 차이에 있을 것이다. 이미 여러 번 언급했던 현상과 실재에 관련된 내용을 상기해 보면, 철학적 성찰이 있기 전에는 누구나 상식적으로 우리에게 나타나는 것이 실제로도 그러할 것이라고 여긴다는 것을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철학적으로 그것을 반성해 보면 현상과 실재를 구분할 수밖에 없다. 또한 근대의 자연과학의 발전에 힘입어 자연사물의 ‘진정한’ 모습에 대한 관심도 증대되었다. 그래서 상식적이고 감각적인 지식을 넘어서는 진정한 지식을 획득하려고 근대 철학자들은 노력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전까지의 상식적 관점에서 쉽게 벗어나기가 쉽지 않고, 또 인간은 기본적으로 육체에 얽매여 있고 감각에 구속되어 있는 존재이므로 이성의 온전한 가능성과 능력대로 지식을 갖는 일이 결코 일순간에 이루어질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따라서 근대 철학자들은 하나 같이 인간을 이런 미성숙으로부터 해방시키고자 했고, 이렇게 “정신을 감각으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것”에 가장 적절한 방법론으로서 데카르트는 회의를 선택했다. 우리가 자연적으로 얻게 되는 모든 지식들에는 이렇게 상식과 단편적이고 감각적인 지식이 전제되어 있으므로 이 지식들을 하나하나 회의해 보는 것이 그 지식들의 부당성을 가장 잘 보여줄 수 있기 때문이다.
2. 방법론적 회의
이런 데카르트의 회의를 우리는 방법론적 회의라고 부른다. 그것은 단순히 회의 그 자체를 위한 회의라는 뜻이 아니라 진리에 도달하기 위한 방법으로서 행해지는 회의라는 뜻이다. 우리가 회의에 회의를 거듭하고 가능한 모든 회의를 다 했는데도 도저히 회의하고 의심할 수 없는 것이 남아 있다면, 그리고 이것이 모든 회의를 다 이겨낸 지식이라면 그것이 곧 우리가 찾는 진리인 것이다.
그래서 이제 데카르트는 우리의 모든 지식들을 하나하나 다 의심해 보고자 한다. 그럴 때에 가장 먼저 간단하게 의심할 수 있는 것은 우리 주위의 모든 것들일 것이다. 여기 보이는 책상, 의자, 나무 등 여러 가지 것들인데 그런 모든 개별적 대상들에 대한 개별적 지식들을 하나하나 철저하고 완벽하게 의심하는 것은 끝내기가 매우 어려울 것이라고 쉽게 생각할 수 있다. 왜냐하면 개별적인 지식들은 그 수가 무척 많고 또 다양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런 다양한 개별적 지식을 낳는 방법을 의심하면 철저하고 완벽하게 의심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갖는 수많은 지식들을 낳는 방법은 당연히 감각 경험을 통하는 것이다. 우리는 경험을 통해서 내 앞에 있는 책상, 의자 등 모든 것에 대한 지식을 얻는다. 그러나 이런 감각 경험이라는 방법은 우리가 이미 숱하게 말했듯이 확실한 방법이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지각을 할 때 흔히 착각하고 잘못 판단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감각기관은 종종 우리를 속이고 기만한다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다. 그런데 데카르트는 단 한 번이라도 우리를 속인 일이 있는 것은 결코 전폭적으로 신뢰하지 않겠다는 규칙을 세운다. 그래서 우리가 종종 갖는 감각에 의한 오류는 곧 감각 경험 일반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진다.
우리가 감각경험을 믿을 수 없는 두 번째 이유는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것이 꿈속에서 일어난다고 의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이른바 ‘꿈의 가설’인데, 우리는 감각 경험을 통해 얻은 상식적인 세계를 실재한다고, 현실이라고 여기지만 그것은 어쩌면 꿈일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이 생각이 얼핏 허무맹랑하게 보일지도 모르겠지만 이 가설을 부정할 수 있는 확실한 근거도 없다는 것 또한 사실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몇 몇 문학 작품들, 예를 들어 ‘구운몽’이나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 등에서 주인공들은 자신이 꿈속에 있는 줄도 모르고 그 꿈속에서 일어난 일들을 현실이라 착각하고 있다. 그들이 그 꿈에서 깨어나지 않았다면 그들은 아마도 영원히 그것이 진짜 세계라고 착각할 것이다. 또한 공상과학영화 ‘Matrix’의 예를 들어 보자면, 영화 속에서 사람들은 멋있는 모습으로 거리를 활보하고 다니는데 사실 이 환경은 사이버공간이며 가상의 틀인 Matrix일 뿐이고 실제로 인간들은 기계들이 마련해 놓은 일종의 인큐베이터 안에서 생체 에너지를 빼앗기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주인공들을 제외한 대다수의 사람들은 이 가상의 세계 매트릭스가 현실이라고 굳게 믿고 있다. 이렇게 꿈이나 가상 세계 등에서 현실과 똑같은 느낌이 들도록 모든 것이 그럴듯하게 짜여 있으면 그 안에 있는 당사자는 그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을 가능성이 충분하다. 이런 가설까지 총동원하면 결국 우리는 감각경험과 그를 통해 얻은 모든 지식들과 이 현실 세계가 확실하지 않은 것으로 의심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면 꿈속에서건 현실 안에서건 항상 성립하는 것도 있다. 가령, 2+3=5라는 것은 꿈이 아닌 세계에서도, 꿈에서도 참이다. 우리가 꿈꾸고 있는 동안에도 여전히 2+3=5이고, 삼각형은 세 개의 변을 가지며, 둥근 사각형은 불가능하다. 꿈에서도 이런 지식이 성립한다는 사실은 우리가 이러한 수학적 지식들을 획득하는 데 있어, 감각 경험이 불필요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런 지식들은 감각 경험이 아니라 순수하게 정신적인 방법을 통해서 획득될 수 있는 것이다. 물체의 연장, 형태, 크기, 수와 같은 것들은 꿈속에서도 현실과 똑같이 역시 그러하고 (기껏해야 그 배열과 배치를 우리의 무의식이 임의대로 뒤바꿀 수 있을 뿐이다) 따라서 꿈의 가설을 이용해도 흔들리지 않는 확실한 지식인 셈이다.
그러므로 이런 종류의 지식들을 명증적인 지식으로 삼고 회의를 멈추어도 될 것 같은데 여기서 데카르트는 한 걸음 더 나아가 다소 엉뚱한 상상을 덧붙인다. 그것은 혹시 우리를 창조한 전지전능한 창조주가 악한 심성을 갖고 있는 존재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가정이다. 아니면 어떤 악마와도 같은 존재가 있어서 우리를 순수한 악의로 계속해서 기만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이것이 바로 ‘악마의 가설’인데, 어떤 전능한 악마가 있어서 수학적 지식을 획득하는 방법, 즉 순수하게 정신적인 방법도 그 악마가 만들었다고 생각해보는 것이다. 그리고 이 악마는 물론 이를 통해 악의적으로 잘못된 지식을 산출한다. 하지만 이 악마는 우리 인간이 이 정신적인 방법을 사용해서 무언가를 알 때마다 이 지식이 자명하고 참된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도록 우리 정신을 조작하는 것이다. 그래서 2+3은 본래 6인데 악마는 우리로 하여금 5라고 잘못 계산하게끔 만들었고 더 나아가 우리는 그것이 확실하게 참이라고 잘못 의식하게끔 만들기도 했다. 만약 사정이 정말로 이렇다면 우리가 이 전 단계의 회의에도 굳건히 살아남은 수학적 지식, 이성을 통한 지식도 참되고 확실한 것이라고 자신할 수 없다. 데카르트는 이제 우리가 과연 이런 악한 존재가 없다고 확신할 수 있는 근거를 갖고 있는지 물음으로써 그의 방법론적 회의의 절정에 다다른다. 이런 극단적인 회의는 물론 현실성이 부족해 보이지만 과연 우리의 지식이 얼마나 확실하지를 따지는 데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래서 이제 수학적 진리를 포함해서 가능한 모든 것이 의심스럽게 되는데 이렇게 의심에 의심을 계속하던 데카르트는 의심의 끄트머리에서 다음과 같은 생각을 한다.
내가 지금 꿈을 꾸고 있다고 하더라도, 이 꿈을 꾸고 있는 나는 존재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그리고 내가 지금 전능한 악마에서 철저히 속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 속임을 당하는 나는 반드시 존재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런 의심을 하고 있는 바로 이 순간에도, 의심을 하는 내가 존재해야 의심도 가능하고 회의도 가능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의심하는 나, 회의하는 나, 이 모든 것을 생각하는 나는 반드시 존재해야 한다는 결론에 다다른다. 그의 말을 인용하자면,
“그러나 이런 식으로 모든 것이 거짓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동안에도 이렇게 생각하는 나는 반드시 어떤 것이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ego cogito, ergo sum)’라는 진리는 아주 확고하고 확실한 것이고, 회의론자들이 제기하는 가당치 않은 억측으로도 흔들리지 않는 것임을 주목하고서, 이것을 내가 찾고 있는 제일원리로 거리낌 없이 받아들일 수 있다고 판단했다.” - 『방법서설』 1권 7장
이런 체계적 회의 끝에 데카르트는 회의할 수 없는, ‘나 자신은 존재한다.’는 진리에 도달한다.
“악령이 온 힘을 다해 나를 속인다고 치자. 그러나 내가 나 자신이 어떤 것이라고 생각하는 동안, 그는 결코 내가 아무것도 아니게 끔은 할 수 없을 것이다. 이렇게 이 모든 것을 세심하게 고찰해본 결과 ‘나는 있다. 나는 존재한다.’라는 명제는 내가 이것을 발언할 때마다 혹은 마음속에 품을 때마다 필연적으로 참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 『제1 철학에 관한 성찰』 중 제 2성찰.
이 회의 불가능한 진리,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ego cogito, ergo sum).’라는 명제는 철학적 탐구가 획득한 첫 번째 결론이자 데카르트 철학에서 제 1원리의 위치를 차지한다. 그는 이 원리로부터 진리의 기준을 이끌어 내는데, 그는 이제 모든 철학적 탐구의 결과는 이 명제처럼 회의 불가능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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